클릭에 눈먼 언론, 여성 비하 언어 '○○녀' 양산

여성 성별 부각한 용어 사용
불필요한 피의자 신상 강조
"언론, 여성주의 관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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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사건을 통해 언론들의 젠더 감수성 수준이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지난달 17일 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의 공용화장실에서 한 남성이 일면식도 없던 여성을 살해한 이번 사건을 두고 ‘여성혐오’ 이슈를 대하는 언론의 보도 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 역시 높아지고 있어서다. 누차 반복돼 온 ‘OO녀’와 같은 표기에서부터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을 둘러싼 여러 언론의 태도까지, 언론이 그동안 여성혐오를 당연시 받아들이고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만드는 데 지속 일조해 왔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강남역 살인사건…‘맥락맹’의 언론
강남역 살인사건이 터진 후 언론들은 일제히 관련 사안 보도를 쏟아냈다. 포털 네이버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검색 시(지난달 30일 오후 5시30분 기준) 18일 오전 9시께 한 경제지 온라인팀의 최초 보도를 시작으로 총 4649건, 하루 평균 357건의 보도가 나왔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의 피해여성 추모 움직임과 사건 진행 추이까지 언론은 사건 발생의 개요와 변화 국면을 전하는 것부터 후속적으로 사건의 의미를 규정하고 해석하는 데까지 줄기차게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해서’라는 피의자의 진술이 공개되며 ‘여성혐오’ 범죄로 부각된 이 사건은 젠더 이슈를 대하는 언론보도의 태도를 가늠하는 리트머스지가 됐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적 언론보도 프레임은 △묻지마 범죄 △정신질환자의 소행 △‘남혐’ 몰기와 남녀대결 구도 △호신술, 공용 화장실 등에 대한 조명 등 크게 네 가지다. 이들 프레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번 사건을 여성혐오로 보는 주장의 맥락을 전혀 고려치 않았거나 (비)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데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은 쪽지 등이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란 이유로 감내해 온 ‘일상적’ 폭력이 어디까지 치달을 수 있는지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드러낸 것이란 맥락은 이런 프레임에서 무시되거나 문제의 본질을 흩트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지난달 22일 서울지하철 2호선 강남역 10번 출구를 찾은 시민이 ‘강남역 살인사건’ 피해자 여성을 추모하고 있다. (뉴시스)

‘묻지마 범죄’라는 프레임은 이번 사건을 ‘원인도 이유도 알 수 없는 것’이란 결론으로 가게 만드는 수순이다. ‘정신질환자의 소행’이란 점을 강조한 보도는 ‘문제라곤 없는 지금 여기에서 돌연 발생한 문제적 개인의 이상 행동’으로 여기게 만든다. 강호순, 유영철 등 사건보도에서 반복되던 행태로 <정신질환자 ‘이상 범죄’ 72% 정신분열증이 원인-SBS>, <‘묻지마 살인’ 부른 망상, 국내 50만명 정신분열증 앓고 있다-뉴스1> 등의 보도가 대표적인 사례다. <남녀 성 대결 변질-MBN>, <“말조심해야지” 강남 묻지마 살인에 위축된 남성들-국민일보>,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 여혐 vs 남혐 불 붙이나?-헤럴드경제> 등 일부 보도는 한술 더 떠 이들의 주장을 ‘남성혐오’로 몰거나 대결 구도를 조장했다. 지난 3월 발표된 경찰청 통계에서 데이트폭력 피해자 중 92%가 여성,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가정폭력 통계에서 가해자 중 77%가 남성으로 드러난 현실에서 이는 공정하지도, 사회를 선도하지도 못하는 보도가 된다. 호신술이나 호신용품에 대한 관심과 공용 화장실 등에 대한 안전대책 방안 마련을 촉구하는 보도들 역시 애초 이뤄진 문제제기의 맥락을 무시하거나 사안의 본질을 빗나간 지적에 가깝다.

언론 반복되는 ‘여성혐오’…왜?
이 같은 현실은 이번 사안에만 해당되는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언론이 그동안 일상적으로 보여준 젠더 감수성에 대한 저열한 인식이 좀 더 극명하게 드러났을 뿐이다.


강남역 살인사건 관련 보도에서도 모 일간지는 ‘노래방 살인녀’라는, 여성의 성별을 부각한 용어를 사용한 보도를 내보내 누리꾼들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살해당해 트렁크에 담긴 여성은 ‘트렁크녀’, 남성이 뿌린 염산에 맞은 피해 여성은 ‘염산녀’, 고양이 밥을 주다가 옥상에서 던진 벽돌에 맞아 숨지면 ‘캣맘’이 되는 것이 언론보도의 현실이다. SNS 등 공간이 여성혐오를 지탄하는 목소리로 들끓고 있는 중에도 모 여성 연예인은 ‘상간녀’라 불리고, 호주 여성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성폭행을 당했고 경찰 등으로부터 적절한 조치를 받지 못했다는 외신 보도는 ‘호주녀’로 소개된다. <‘12살 숙녀’ 6월부터 자궁경부암백신 무료>라는 보도의 제목에서 드러나듯 한 통신사는 ‘기어코 여성을 드러내는 제목을 쓰고 말겠다’는 강박을 드러내기도 했다.


가해자를 변호하는 듯한 보도도 반복돼왔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전하면서도 언론은 <“여자들이 날 무시해” 노래방 화장실서 여성 살해> 등의 제목을 단 보도를 게재했다. 일부 보도는 <“여자가 무시” 목사 꿈꾸던 신학생 묻지마 살인>이라는 피의자의 신상을 더하기도 했다. 가해자의 범죄가 타당한 이유를 갖고 있다는 인상을 줄 여지가 있는 제목이다. 언론중재위원회 한 관계자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심각한 문제인데 가해자의 진술을 전면에 드러내는 건 윤리적으로 문제소지가 있고 섣부른 측면이 있다. 진술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업계와 여성 단체 관계자들은 언론들의 이 같은 행태의 원인을 젠더 감수성 부족과 포털에 종속된 미디어 환경에서의 무한경쟁 등이 결부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윤소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사무국장은 “결국 언론들이 이번 사건을 다루는 데 여성주의적 관점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엄호동 파이낸셜뉴스 부국장은 “검색이 되기 위해선 단어 하나로 똑 떨어지는 게 필요하다. 이용자들 입장에서도 전체 사건을 설명하는 것보다 단어 하나로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되다보니 이런 표현이 반복되는 것 같다”고 밝혔다.


최민영 경향신문 미디어기획팀장은 “사건기사조차 범죄오락소설 같은 프레임을 유지하고, 가해자의 시선에서 피해 여성을 바라보는 ‘스토리텔링’식의 기사가 나온다”며 “자율규제 등을 통한 원칙을 세워야 되는데 트래픽에 목을 매다보니 저질스러운 기사가 양산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언론 보도가 관행처럼 사용해 온 아주 사소한 보도 관행부터 바꿔야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사건기사 등에서 남성과 여성을 달리 표기하는 데 대한 지적이다. 현재 연합뉴스, 뉴시스, 뉴스1 등 3개 통신사와 조선, 중앙, 동아, 경향, 한겨레, 한국, 국민, 세계, 서울, 문화 등 10개 주요 일간지들은 모두 사건기사 등에서 남성은 ‘A(34)’, 여성은 ‘B(여·24)’ 등으로 여성의 경우에만 성별 표기를 하고 있다. 남성은 ‘둘 이상의 성 중 하나’가 아니라 성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고, 여성은 보편적인 성이 아닌 특별한 존재가 되는 시각이 반영된 결과다. 지면제작의 효율성을 위해 관행처럼 이뤄져 온 가이드라인일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 해악이 크다고 한다면 모두 없애거나, 모두 기입하는 식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는 제언이다.


이윤소 사무국장은 “동성애자,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혐오는 어떤 감정인지 단박에 알아차리지만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여성혐오에 대해서는 사회가 단어 자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면서 “모르면 물어보면 되는데 편견에 기반해 계속 같은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이런 미세한 차이들이 사회 전체의 여성차별을 만들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최승영 기자 sychoi@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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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여성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경향·오마이·서울·한겨레 등
기획기사 통해 여성혐오 조명
기자칼럼 등 자성 목소리 ‘눈길’


“당신의 꿈은 뭐였어요? 왜 언론은 가해자의 꿈만 말하고 있나요?” “‘묻지마 살인’으로 프레이밍 하지 마세요. 계획적으로 발생한 ‘표적살인’입니다.”


지난달 17일 서울 강남역 부근 건물 화장실에서 여성이 흉기에 찔려 숨진 사건이 발생하자 이튿날부터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국화꽃이 놓이고 수많은 포스트잇이 나붙었다. ‘묻지마 살인’으로 언론에 보도된 이 사건이 명백한 ‘여성혐오 범죄’라는 사실을 환기시키자는 한 누리꾼의 제안으로 시작된 추모 행위였다. 강남역을 방문한 시민들은 단순한 애도를 넘어 여성혐오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자고 소리 높여 외쳤다. 책임의 일정 부분은 언론에 있다는 지적도 수차례 제기됐다.


그에 대한 화답일까. 여전히 이 사건에 대해 ‘묻지마 살인’으로 명명하고 ‘여성혐오vs남성혐오’ 갈등으로 몰아가는 언론이 있지만 일부에서는 반성의 노력을 보이고 있다. 언론을 비판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기사에 싣고 기자 칼럼으로 반성하는가 하면 연속 기획으로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여성혐오를 되짚어 보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는 지난달 22일 ‘○○녀 만드는 언론도 가해자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추모 현장에서 언론의 보도 행태를 지적하는 포스트잇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면서 사건 현장 CCTV를 그대로 노출한 방송 보도를 지적하는 기사였다.


오마이뉴스 역시 18일 현장에 모인 시민들이 언론의 태도에 분노하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도했다. 오마이뉴스는 “‘강남 유흥가’로 명명된 보도가 잘못됐다는 건 현장에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고 전했다. 지난달 24일에는 사건의 본질에 침묵한 채 가해자의 특징만 부각하는 그동안의 언론 행태를 총체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일부 기자들은 칼럼을 통해 반성문을 썼다. 이혜리 경향신문 기자는 지난달 20일 기자메모에서 “시민들의 지적은 언론의 사건 보도 태도를 되짚어보게 한다. 기자도 ‘묻지마 살인’이나 ‘번화가와 유흥가’라는 단어를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면서 “그동안 혹시 우리는 여성혐오, 그 무엇에 대한 혐오를 방조해오지 않았는가. 추모가 시작된 이후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권석천 중앙일보 기자도 “여성혐오, 여성 차별이란 단어 앞에서 얼마나 떳떳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면서 지난달 24일자 ‘권석천의 시시각각’에 관련 내용을 실었고, 전홍기혜 프레시안 기자도 칼럼을 통해 “지금 언론이 해야 하는 일은 엉뚱한 갈등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말하는 바, 요구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속 기획을 통해 여성혐오를 조명한 언론도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달 20일부터 ‘강남역 여성살인 사건-여자가/남자가 말한다’ 연재를 시작으로 다양한 기획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전문가 연쇄 인터뷰를 비롯해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연속기고를 통해 법률적, 문화적으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도 지난달 24일부터 수차례에 걸쳐 각각 ‘우리는 여혐사회 속에 산다’ ‘2016 한국, 여혐과 마주서다’라는 제목의 연속 기획을 실었다. 여성들이 겪는 여성혐오와 그에 맞서 싸우는 여성들, 여성혐오 논란 역사에서 대표적인 7가지 장면 등을 조명했다. 서울신문도 지난달 30일부터 ‘혐오에 빠진 대한민국’ 기획을 상하로 나눠 내보냈다.


김영희 한겨레 사회에디터는 “현장기자의 얘기, 젊은 기자들의 발제를 보면서 그동안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터져 나왔다고 보고 기획을 시작하게 됐다”며 “여성혐오 범죄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 사건이 촉발한 사회적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왕 말문이 터졌으니 끝까지 얘기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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