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소녀' 무더기 오보…받아쓰기 민낯

미주 중앙일보 첫 보도 뒤
앞 다퉈 쓰다 줄줄이 오보
반성 않고 귀국 모습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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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말마저 믿어선 안 된다.” 미국 기자들이 사실 확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자주 인용하는 말이다.


“미국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를 동시에 합격한 데다 양 대학을 2년씩 다닌 뒤 한 곳의 졸업장을 선택할 수 있다. 학교 선택을 고민하는 그의 블로그를 보고 페이스북 CEO인 마크 저커버그가 전화를 걸어왔다”는 한 소녀의 주장은 여과 없이 지면과 전파를 탔다. 결과는 또다시 대형 오보로 이어졌다.


언론의 ‘받아쓰기 관행’이 오보 참사로 이어지면서 또다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것 같았던 ‘한인 천재소녀’의 성공 신화는 일주일 만에 ‘허언’으로 드러났다. 일방적인 주장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지만 검증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못한 채 설익은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주요 언론사들이 일방적인 주장에 놀아난 셈이다. 우리 언론의 ‘성과주의’와 ‘받아쓰기’의 취재 관행이 빚어낸 참사다.


당초 미국을 대표하는 두 명문 대학이 한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초유’의 제도를 만들었다고 보도했는데, 이렇게 만든 연구 결과물에 대한 언론의 검증작업이 있었다면 이번 오보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언론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천재 한인소녀’ 오보는 우리 언론의 ‘성과주의’와 ‘받아쓰기’가 빚어낸 참사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특히 이번 사태는 속보경쟁 탓에 ‘받아쓰기’마저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지는 취재 관행에 경종을 울렸다. 그동안 타 사에서 쓰는 기사만큼은 ‘물 먹어선 안 된다’는 인식이 편집국이나 보도국에 뿌리 깊게 자리 잡으면서 오보가 기생할 수 있는 ‘숙주’ 역할을 해 왔다.


실제로 이번 기사는 미주 중앙일보에서 첫 보도한 이후 연합뉴스 등을 거쳐 경향신문, 국민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주요 신문사들이 앞다투어 받아썼다. CBS ‘박재홍의 뉴스쇼’는 김양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최근 미국 명문대에 진학하는 사례가 늘면서 한인 학생들이 복수 대학을 합격했다는 소식은 ‘구문’이 된지 오래다.


하지만 이번 소식이 지면이나 전파를 탈 수 있었던 것은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가 학생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이런 이유 때문에 기자들이 한번쯤 의심해 봤어야 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또 화제의 주인공이 전직 언론인 딸이자 11~12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모 전 장관의 손녀라는 점도 확인 작업을 느슨하게 한 이유 중 하나다. ‘간판’에 대해 우리 언론이 얼마나 ‘맹신’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미국 대학은 프라이버시 보호를 이유로 지원자의 합격 여부를 확인해주지 않는다는 데다 특파원 1~2명이 미 한인사회까지 커버하기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는 현실적 어려움도 분명히 있다.


실제 김양의 주장이 거짓임을 처음 밝힌 경향마저 검증할 시간이 부족해 연합 기사를 참고해 관련 기사를 송고한 뒤 후속 취재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경향이 후속 취재하기 전까지 하버드에 합격증 진위 여부를 묻는 국내 언론사가 없었던 것은 곱씹어 볼 문제다. 


워싱턴 특파원 출신의 한 중견기자는 “특파원 혼자 한인 사회까지 커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적잖은 특파원들이 연합뉴스 기사를 참고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그러나 이번 오보는 어떤 이유에서든 변명의 여지가 없고, 언론의 기본인 확인의 중요성을 또 한번 일깨워준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거짓임이 밝혀진 이후에도 미성년자인 김양의 귀국하는 모습까지 시청률이나 트래픽을 위한 ‘먹잇감’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언론이 이번 일을 반면교사로 삼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제2, 제3의 오보사태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게 언론계 중론이다.


사회부장 출신의 한 종합일간지 중견 기자는 “황우석 사태 때 언론이 불러 주는 대로 받아쓰기만 해 오보를 했는데 이번 역시 마찬가지”라며 “받아쓰기 관행은 기자 개인이나 한 언론사 혼자만의 힘으로는 개선할 수 없기 때문에 언론계 전체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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