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지난 지금도 사고현장 참상 생생하게 떠올라"

[취재이야기 공모 우수상]조선일보 최원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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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년 8월 괌 리미츠힐에 추락한 KAL 801편 여객기 추락사고 현장. 참사현장에 접근이 금지된 상태에서 당시 조선일보 취재팀은 정부조사단 완장을 차고 현장에 접근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 제공)  
 

   
 
  ▲ 조선일보 최원석 기자  
 
[우수상]‘기자도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 앓을 수 있다


마침 사회부 야간데스크였다. 15년 전인 1997년 8월6일 새벽2시쯤. 시내판까지 모두 마감된 상태에서 머리가 멍해진 상태로 TV 화면을 무심코 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 다리를 얹고 머리에 손을 깍지 낀 ‘느긋한 자세’ 그대로였다. 화면에 대한항공기 그림이 뜨기 전까지는.

사회부에는 TV를 여러 대 켜두고 각종 방송을 모니터하도록 돼 있다. 그 중 한 대가 CNN에 맞춰져 있었고, 그 화면에 뜬 ‘Korean Air Crash’라는 자막과 파란색 비행기 그림을 본 것이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비행기 떨어졌다!”고 소리쳤다. 머리에 ‘수백명 사망’이라는 기사 제목이 팍 떠올랐다. 이어 나의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들은 기자들이 메뚜기 뛰듯 편집국 안을 뛰었다. 편집국이 북새통이 되면서 국제부에도 전화가 빗발치듯 걸려오기 시작했다. 바로 226명의 생명을 앗아간 대한항공기 801편 괌 추락 사고 취재의 첫 시작을 이렇게 열었다.

추락한 비행기 다음 편으로 현장 직행
야간데스크로서 가장 먼저 이혁주 사회부장(현 조선일보 CS본부장)에게 다급히 전화를 걸었다. “비행기가 떨어져서 지금 나오셔야겠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진 듯했다. 당시 최장원 캡(현 조선일보 경기남부 취재본부장)에게도 전화를 걸어 “비상사태입니다. 나오셔야 합니다”라고 다급히 전한 뒤 사회부 상원과 하원 전원에게 ‘비상’을 걸었다.

곧바로 출근한 이혁주 부장은 나와 사회부 경찰 야근을 하던 이건호(현 이화여대 교수) 기자에게 당장 괌 출장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사고소식을 처음 들어 알렸으므로 이 사건에 대해 지금 다른 누구보다 더 잘 알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당시 내가 알고 있던 것은 그저 대한항공기가 괌에서 추락했다는 사실 하나 뿐이었지만 부장의 지시이니 거역할 수 없었다. 밤을 꼬박 새우며 편집국 내 전 부서 기자들이 달려들어 호외를 찍어낸 뒤(신문 마감이 지나 이 소식을 실을 수 없었다. 또 호외는 인터넷 속보 등이 활성화되면서 이후 한국 언론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한숨도 자지 못하고 비행기를 타러 가야 했다. 추락사고가 나자마자 그 다음 비행기로 사고 지점에 가야 한다니. 아득했다. 나중에 기장과 관제탑 간의 교신 잘못이 원인으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기상악화로 인한 추락으로 알려져 있어서 다음 비행기라고 또 떨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이 사건을 취재함으로써 대형 사망사고 취재의 정점을 찍는 셈이 됐다. 괌 사고를 끝으로 더 이상 인재(人災)로 인한 이 정도 규모의 대형 참사는 우리나라에 없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많은 사연들이 얽혀 있는 취재현장에서 기자가 된 것에 회한을 느낀 것도 처음이었다.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사고현장의 참상과 유족들의 애타는 고통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걸 보면 참상을 본 취재기자도 함께 일종의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1993년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로 200여 명이 사망했을 때 취재 가서 본 물에 불은 시신들보다 불에 탄 시신이 더 선명하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역시 사고 취재의 힘듦이나 취재과정의 어려움이 아니었다. 바로 피해자들의 고통이 기자에게도 전이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 사고 당시 퍼시픽스타호텔 그랜드볼룸은 226명의 영정이 차려진 빈소가 됐다. (조선일보 제공)  
 
눈물 젖은 취재수첩

이렇게 기자의 삶에 대한 ‘회한’을 잠시라도 갖게 됐던 계기는 사고 후 이틀째에 찾아왔다. 당시 대한항공 괌 지점장도 이 사고로 가족을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였다. 박완순 당시 지점장은 괌에 부임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은 신참이었다. 그날 사고비행기에는 두 달 늦게 합류하는 가족인 부인, 딸, 아들이 타고 있었다. 이 사고로 부인과 아들이 숨졌고, 딸만 살아남았다. 박 지점장은 사망자 명단을 통해 딸이 생존한 것을 알고도 금세 만날 수 없었다. 대한항공의 현지 책임자로서 사고수습을 최우선시해야 했기 때문이다.

박 지점장이 딸을 만난 시점은 거의 만 하루가 지나고서였다. 본인도 유족인데 다른 유족에게 멱살 잡혀가며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느라 지친 상태였다. 딸을 만나자 딸은 반가움보다 먼저 아빠에게 사죄부터 했다. “아빠, 잘못했어요. 엄마랑 수진이(남동생)를 내버려 두고 나만 살아나왔어요.” 어린 딸이 받았을 충격은 얼마만 했을까. 아마 그가 감당할 수준을 훨씬 넘어섰을 것이다. 죽지 않고 자기만 살아나와 죄송하다는 그 딸의 말에 내 머릿속도 뒤죽박죽이 됐다. 박 지점장은 “너라도 살아 있어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앞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더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이 사람 나중에 자살하는 거 아닌가’라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박 지점장은 홍보팀장을 거쳐 퇴직 후 지금은 호서대 초빙교수로 인성교육을 전파하는 명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박 지점장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물이 흘렀다. 그는 딸 앞에서는 강하게 보이려고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데 이제 털어놓고 나니 눈물이 난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역시 가슴이 먹먹해지고 목이 메었다. 계속 질문을 던져 취재를 마쳐야 했는데 우물쭈물할 뿐 말이 목 밖으로 툭 나오질 않았다. 한 5분쯤 그렇게 둘 다 아무 말 없이 앉아 눈물을 흘렸다. 나중에 취재수첩을 보니까 박 지점장의 말을 받아 적으면서 뭐라 적었는지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일부는 삐뚤빼뚤이었고, 일부는 물기에 번져서 판독하기 어려웠다.

그런 수첩을 보고 기사를 정리하면서 잠시 고민에 빠졌다. ‘왜 기자는 남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고 글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가, 그로부터 나 역시 상처를 받을 걸 알면서 왜 이 직업을 지속하는가’. 10년차 기자로서 한창 물이 오르던 상황에서 갑자기 ‘쿵’하면서 가슴을 치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기자의 역할이 이 사회와 개인의 삶에서 갖는 의미를 비교형량하면 쉽게 탈출할 수 있는 고민인데도 당시로서는 상대적으로 작은 이 질문에 한참을 매어 허둥대고 휘청였다. 이런 회의(懷疑)는 앞서 겪었던 많은 사건, 사고 취재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기자는 늘 사건과 동화(同化)돼서는 안되며 한 발 떨어져 봐야 그 실체를 볼 수 있다는 진리를 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스스로 당황스러웠던 것 같다.



   
 
  ▲ 괌 리미츠힐에 추락한 KAL 801편 여객기 잔해에서 발견된 승무원의 메모. (연합뉴스)  
 
“오지 말자니까…” 분노로 쓴 칼럼

그렇게 정신없이 며칠이 흐르는 사이, 다시 한 번 사고 현장을 기자로서 객관화시키지 못하는 ‘사건’이 생겼다. 사고가 터진 후 정부 당국이나 대한항공 자체에서 별다른 입장표명 없이 며칠이 지난 상황에서였다. 괌의 한 호텔에 차려진 빈소를 지키는 유족들 사이에서 정부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 즈음이었다. ‘왜 책임있는 당국자 아무도 빈소를 찾아 설명하지 않는 거냐’는 이야기였다.

사고 발생 3일 후 당시 건설교통부 장관과 외무부 국장 등 정부대표단이 빈소에 들렀을 때는 이미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상태였다. 정부대표단이 늦게 도착한 사정을 유족들은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격앙된 유족들이 ‘정부는 뭐하는 거냐, 이제 와서 변명만 늘어놓을 거냐’면서 거세게 항의하는 와중에 몸싸움에 이르자 유족에게 둘러싸여 있던 장관이 빈소에서 뛰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관을 쫓아 뛰다가 함께 엘리베이터를 어렵게 탔는데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 들렸다. “그러길래 오지 말자니까...” 아랫사람을 탓하는 장관의 말이었다.

이 말을 듣고 기자인 나는 그때 분노한 유족의 한 명이 돼 버렸다. 곧장 회사에 현장 칼럼인 ‘기자수첩’을 쓰겠다고 발제한 뒤 ‘달아나는 장관’이라는 제목으로 뒷북치기식 정부 대처를 비판하는 기사를 보냈다. 결론부터 말해 이 기사는 끝까지 살아남지 못했다. 가판에 실렸다가 다음 판에서 빠진 것이다. 기자가 유족 입장이 돼 감정이 앞선 상태에서(그때 이 장관의 말을 듣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면 아마 나는 기자가 아니라 성인반열에 오를 그런 인물이었을 것이다) 쓴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정부 고위 당국자가 가판에서 이 글을 봤는지 다음날 공보처 국장단이 기자단 ‘위무’를 위해 급히 괌으로 날아왔다. 총리실 출입을 할 때 공보처를 함께 맡았던 내가 안면이 있는 국장급 인사를 선발해 보낸 걸 보면 다분히 내 기사를 염두에 둔 조처였다고 생각한다. 그 국장 역시 언론계 출신 선배여서 ‘조지더라도 정부 입장에 대한 설명이라도 들어보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단독 현장 투입으로 빚어낸 특종
사실 이런 대형 사건일수록 ‘특종’은 쉽게 나오지 않는 법이다. 많은 기자가 필사적으로 달라붙어 작은 팩트라도 찾아내 쓰려다 보면 중간에 새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고원인에 관한 새로운 단서라도 미 공군이 밝혀주면 좋겠지만 미국의 일하는 방식은 ‘빨리빨리’에 익숙한 우리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매일 브리핑을 하면서도 종국에 최종 원인은 1년 뒤에나 나온다고 했다. 속보를 쓰는 입장에서 김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매일 기사를 생산해 내려다보니 피해자의 사연이나 가십거리와 같은 이야깃거리를 찾으러 다녀야 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특종’이 찾아왔다. 그날은 사고 후 만 4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국내 언론은 아무도 사고 현장인 비행기 잔해 현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 미 공군이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즈음 정부 조사단이 괌에 입국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가장 먼저 건교부 국장급 단장의 신원을 확인했다. 평소 건교부 출입선배와 친하게 지낸다는 소리를 들은 바 있는 H국장이었다. 이어 회사로 전화를 걸어 건교부 출입선배를 찾았다. “H국장이 정부 조사단장으로 왔는데 전화 좀 해주세요. 현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말이죠.”

이후 따로 H국장을 찾아가 조사현장 ‘동행’을 부탁했다. H국장은 조금 주저하는 듯한 표정으로 생각 좀 해보겠다고 했다. 도와준 사실이 드러나면 조선일보를 제외한 모든 언론을 ‘적’으로 만들 수 있어서다. 하루가 지나 고민하는 듯한 그에게 건교부 출입선배 이야기를 꺼냈더니 ‘해봅시다’며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다. H국장은 그 선배의 평소 인간미와 취재능력을 높이 샀다고 한다(기자는 팔방미인이어야 한다!). 이후에는 일사천리. 후배 기자 1명이 정부조사단 패찰을 차고 다른 조사단원들과 함께 현장에 ‘투입’될 수 있었다. 그 기자와 H국장의 신원이 드러나지 않도록 기사는 ‘특별취재반’ 이름으로 바이라인이 기록됐다.

기사가 보도된 날 아침, 프레스룸이 차려진 괌 호텔은 조선일보 특종을 성토하는 기자들의 아우성으로 시끄러웠다. 어떻게 기자가 몰래 들어가도록 미 공군이나 정부조사단이 모르고 있었느냐는 순진한(?) 비판부터, 조선일보 기자와 정부 당국자가 내통한 거 아니냐는 나름 정확한 비판까지, 높은 옥타브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아침 신문을 보고 회사로부터 전부 한 소리씩 들은 탓이었다.

‘날’ 받아둔 후배의 예상 못한 귀국
그러나 특종했다고 기쁘지는 않았다. 현장 내 참상이 너무나 참혹했기 때문이다. 현장에 들어간 후배 기자가 취재한 내용을 전부 기사화하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 후배도 이 일을 겪은 후 나와 같은 고민을 했던 모양이다. 그 후배가 며칠 뒤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숙소에서 불쑥 “선배, 저 내일 귀국해야겠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아직 쓸 기사가 많은데 갑자기 들어가다니?” “저, 날(?) 받아놨습니다.” “결혼한 사람이 무슨 날을 받아놔?”

취재단 팀장이던 나는 이 후배가 참상을 본 뒤 충격으로 취재를 기피하는 것이거나 매일 3~4시간밖에 자지 못하고 강행군하는 바람에 피곤해서 저러는가 싶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후배가 받아놓은 ‘날’은 ‘아들’을 낳기 위한 날이었다. 부모님이 어느 날에 합방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점괘를 가져와 아들을 호출한 것이었다. 부모님 영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사건을 취재하면서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집착, 후손을 세상에 남겨놔야겠다는 강박감 같은 것이 들었던 것일까. 처음에는 웃어넘기려다가 점점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그때 문득 출장동안 정신없이 보내다 잊고 있던 네살배기 내 아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대형 사건에서는 이처럼 많은 에피소드가 생산되는 법이다. 괌 사고와 관련해서는 위에 언급한 해프닝 말고도 휴가차 괌에 왔다가 취재단으로 변신해 발이 묶여 버린 기자들 이야기, 국회 진상조사단이 사고현장을 찾았다가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기자들끼리 ‘풀 사진이다, 아니다’로 의견이 갈려 옥신각신한 이야기 등 웃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다른 대형사고 취재 때와 달리 하나같이 또렷이 기억나는 걸 보면 내 뇌 속에 상흔처럼 남아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제 이를 글로 풀어놓음으로써 나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고인들의 넋을 위로하고 싶다. 조선일보 최원석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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