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8월, 동아 세 기자 '권력의 폭염'에 유린당하다

중공機 보도 꼬투리 잡아 이채주·이상하·김충식씨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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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5년 8월 24일 전북 이리 근처에 불시착한 중공 폭격기. 전두환 정권은 동아일보가 닷새 뒤인 8월 29일자 2판 1면에 보도한 ‘중공기 조종사 대만 보내기로’란 기사를 구실로 기자 3명을 안기부에 연행했다.(동아일보 제공)  
 

정부 비판 논조 보복…민주화 운동 탄압 ‘본보기’ 삼아


늦더위가 한창이던 1985년 8월29일 광화문 네거리. 검정색 승용차 한 대가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채주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침은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남동으로 갑시다.” 차가 천천히 움직이자 편집국 야간 데스크 김봉호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에서 맴돌았다. “녀석들의 기세가 살벌합니다. 오시더라도 늦게 나타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결국 그것이 잘못된 것인가.’ 이채주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점심 무렵, 정치부에서 중공 폭격기의 승무원 송환 발표가 이날 오후 3시에 있을 것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오후 발표가 예정된 만큼 서울시내 일부 지역에 배달되는 2판에 실어도 무방할 것 같았다. 2판 1면 중간 톱으로 ‘중공기 조종사 대만 보내기로’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정부는 생존 2명에 대한 신병처리를 29일 오후 발표한다. 조종사는 국제법상의 망명자로 간주해 대만에, 통신사는 ‘재난상륙자’로 보아 중공에 보낸다”는 요지였다.

중공 폭격기가 불시착한 것은 닷새전인 8월24일. 전북 이리 상공을 배회하던 폭격기는 제방에 부딪친 후 논바닥에 불시착했다.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조종사는 중상을 입었고 통신사는 무사했으며, 항법사는 사망했다. 조사 결과, 폭격기 조종사가 비행기의 방향타가 고장났다고 속이고 한국으로 망명하려다 비행기 연료가 떨어져 난 사고였다. 조종사는 대만으로 망명을, 통신사는 본국으로 송환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거 발표하는 거요? 오늘?”
당시 정부는 조종사와 통신사의 신병처리를 놓고 고심했다. 정부는 두 사람의 희망대로 신병을 처리키로 하고 발표시점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외무부를 출입하던 정치부 김충식 기자는 그날 오후 정부종합청사 8층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뛰어다니던 장기호 동북아시아 과장을 만났다. 뭔가를 직감한 그는 장 과장에게 물었다. “그거 발표하는 거요? 오늘?” 장 과장은 고개만 끄덕였다. 취재 끝에 정부의 처리방침을 공식 발표 전 미리 알아냈다. 그는 미주국장 부속실에서 전화로 기사를 불러줬다.

하지만 외무부는 예정된 시간인 오후 3시에 공식 발표를 하지 않았다. 부산과 광주 등 지방으로 배달되는 3판 제작을 끝내야 하는 오후 7시까지도 소식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채주는 얼핏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3판에서는 그 기사를 뺐다. 그 무렵, 안기부 직원 몇 몇이 동아일보사 정문에서 어슬렁거렸다. 그들은 편집국장 이채주, 정치부장 이상하, 정치부 기자 김충식을 찾고 있었다. 일부는 편집국으로 올라와 이채주, 이상하가 어디에 있느냐고 소리쳤다.

그날 자정께 이상하가 집 앞에서 연행됐다. 한남동 사장집에서 나와 광화문 한 맥주집에서 경제부장 이현락 등과 함께 사태 추이를 지켜보던 이채주는 이상하의 연행 사실을 보고 받고 회사에 들어가 연행됐다. 이채주를 태운 안기부 차는 남산으로 출발했다. 사회부 기자들이 취재차량을 타고 안기부 차를 뒤따랐다. 안기부 차는 취재차량을 따돌리기 위해 남산으로 직행하지 않고 먼길로 돌았다. 계속 따라붙자 힐튼호텔 앞 남산순환도로 입구 길가에 갑자기 서더니 요원 한명이 내렸다. 왜 자꾸 따라오느냐고 따졌다. 이채주도 기자들에게 그만 돌아가라고 했다. 동아일보 취재차량은 편집국장을 태운 안기부 차가 남산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봤다.

군복으로 갈아입히고 무차별 구타
이튿날인 8월30일 아침, 김충식은 남산에 들어가 조사에 응해주라는 얘기에 따라 회사에 출근했다가 남산 지하실로 잡혀 갔다. 안기부 요원들은 그를 허리띠 없는 청색 군복으로 갈아입히고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주먹세례에 몸을 웅크리자 발길질을 해대고 몽둥이가 날아왔다. 급소를 제외한 몸 전체가 타격 대상이었다. 복날 개 잡듯 두들겨 팬 뒤 옷을 발가벗기고 심문을 했다. 정보를 제공한 외무부의 취재원을 대라는 것과 반골임이 드러났으니 사표를 쓰라는 것이었다. “잘못하면 장 과장이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가혹행위를 견뎠다. 그는 국제법과 관례에 따라 29일 발표할 것이라는 추측보도를 했을 뿐이라고 우겼다. 구타, 심문, 괴롭힘 등이 계속 이어졌다. 옆방에서 편집국장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 퇴계로 쪽에서 본 남산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본청 전경. 왼쪽 안테나가 솟은 수사국 건물 밑이 그 유명한 ‘지하실’이다.(동아일보 제공)  
 

이채주에 대한 심문은 중공 폭격기 기사가 보도된 경위가 초점이 아니었다. 수사관들은 서류보따리를 가져와 1985년 2·12 국회의원 총선거 이후 정권에 비협조적인 기사 파일을 들이대며 구타를 하고 사직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특히 1985년 2월8일 김대중씨가 귀국할 때 1면 2단이라는 보도지침을 어기고 사실상 중간 톱으로 보도한 저의가 무엇이냐고 추궁했다. 학원안정법과 관련한 기사도 심문 대상이었다. 새벽에 나타난 안기부 국장급 간부는 아무도 모르게 죽여버릴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의 인신처리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각하도 양해한 사실이다. 당신을 비행기에 태워 제주도로 가다가 바다에 떨어뜨려 버릴 수도 있고, 자동차로 대관령 깊은 골짜기에 데려가 아무도 모르게 땅에 묻어버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민주화 분출에 전두환 정권 강경책
그해 여름의 정국은 뜨거웠다. 2·12 총선으로 촉발된 민주화의 열망은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 전학련 및 삼민투사건, ‘민중교육’지 사건 등 반정부 민주화 운동으로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이에 대해 전두환 정권은 장세동 경호실장을 안기부장으로 임명하는 등 강경파를 권부에 포진시키며 학원안정법 제정 등 초강경 대응태세로 맞섰다. 특히 학원안정법 입법 여부를 둘러싼 논란 등은 당국과 언론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쳐 그 보도수준을 놓고 긴장상태가 조성되기도 했다. 세 사람에 대한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는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일어났다. 김충식은 “문제된 기사 내용은 구실이었을 뿐, 정권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동아일보에 대한 보복이자 언론계에 대한 군기잡기였다”고 말했다. 

이채주와 이상하는 8월31일 오후, 김충식은 9월1일 오후 각각 풀려났다. 모두 조사받은 사실, 내용, 가혹행위 등을 일절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쓴 뒤 몸에 생긴 피멍을 없애기 위한 ‘안티프라민 치료’를 받았다. 김충식은 그때 남산 지하실에서 요강 단지만한 대용량의 안티프라민이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됐다. 이채주의 하반신에는 안티프라민을 바른 쇠고기가 감겼다. 피 멍든 데는 쇠고기가 치료약이었을까? 얼마 되지 않아 퍼런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9월1일 저녁 동아일보 편집국에 기자 80여명이 모였다. 분노의 소리들이 터져나왔다. 이날 열린 긴급 기자총회에서 기자들은 ‘우리의 입장’이라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동아일보 편집국 기자일동은 최근 언론인들이 당국에 잇달아 연행, 폭행당한 데 이어 특히 지난 8월30일부터 9월1일 사이에 동아일보 이채주 편집국장과 이상하 부국장대우 정치부장 및 김충식 정치부 기자가 연행돼 가혹행위를 당한 사실에 대해 분노한다….” 이날 회의에서 많은 기자들이 성명서를 내자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우선 불법 연행 및 가혹행위에 관한 기사화를 먼저 추진하고 성명서는 사태 추이를 보아가며 거론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동아 기자 결의문, 기사화 못해
하지만 이 사건에 관한 기사는 동아일보에 실리지 못했다. 당시 최고 일간지의 편집국장, 정치부장, 정치부 기자를 데려다 두들겨 팰 수 있었던 그런 시대,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 사건을 9월5일 특집기획으로 보도한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신문의 경영층이 이 사건에 대해 어떠한 것도 보도하지 않도록 하고 사적인 구제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동아의 경영층은 정부의 최고위층에게 이러한 종류의 일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보장하라는 조용한 메시지를 전했다”고 썼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신민당은 2일 국회 내무위와 문공위 소집을 요구했고 신민당 민주화추진협의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의 성명 등이 이어졌다. 동아 기자들의 비상총회가 연일 열린 편집국에는 야당과 재야단체 관계자들의 격려방문이 계속됐다. 국제기자연맹(IFJ)도 강경한 내용의 규탄성명을 발표했다. 외신들의 보도도 이어졌다. 9월4일 로이터통신의 첫 보도를 시작으로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 네이션 등은 이 사태를 상세하게 전했다.

유달리 무더웠던 그해 8월의 끝날,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정치부장 등이 정보기관에 연행돼 고문을 당한 것은 큰 사건이었다. 외신들이 대서특필하고 국제신문인협회(IPI)총회에서 중대 문제로 보고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동아일보는 단 한 줄의 기사도 싣지 못했다. 고문은 당사자들에게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해마다 8월 말이면 고문의 기억에 잠을 뒤척인다. 특히 이채주는 주황빛 전구가 괴물의 눈처럼 침침하게 비추던 지하조사실에서 거인처럼 서 있던 요원을 잊지 못한다. 김충식은 “밀폐된 지하실, 법과 제도의 사각에서 벌어지는 광분한 권력의 행패에 정신 이상이 되지 않고 불구가 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당시 갓 서른을 넘긴 나이였던 김충식은 어느새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희끗해졌고, 이채주는 7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다. 이채주는 동아일보 부설 재단법인인 화정평화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김충식은 가천길재단 기획조정처장 겸 가천의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1988년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던 이상하는 2005년 유명을 달리했다.


<참고자료<>
‘언론통제와 신문의 저항-암울했던 시절 어느 편집국장 이야기’ (이채주 지음, 나남)
동아일보 社史 5권
동우회보 제6호
동아일보 1988년 11월16일 ‘다큐멘터리 5공의 언론수난(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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