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연필'과 '빨간 볼펜'




  설원태 경향신문 여론독자부장  
 
  ▲ 설원태 경향신문 여론독자부장  
 
필자가 ‘파란 연필(blue pencil)’이라는 묘한 표현과 조우한 것은 2005년 7월 하순이었다. 워싱턴 주립대(University of Washington)의 돈 펨버(Don R. Pember) 교수가 쓴 ‘매스 미디어 법(Mass Media Law, 2003)’의 85쪽을 보면 이 표현이 나온다. 펨버는 이 책에서 “헤이즐우드(Hazelwood) 사건에 대한 (미 연방 대법원의 1988년) 판결은 학교 관계자들이 ‘검열인의 파란 연필(censor’s blue pencil)’을 휘두르는 허가증으로 작용했다”고 썼다.



헤이즐우드 사건이란 1983년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 인근의 이스트 헤이즐우드 고교의 학생기자들이 쓰려던 기사를 둘러싼 소송을 지칭한다. 학생기자들은 익명으로 교내 임신경험 여학생 3명을 인터뷰해 ‘10대의 임신 문제’를 다루려 했고, 나아가 익명의 이혼학부모들을 취재해 ‘부모의 이혼이 자녀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도하려 했다. 그러나 학교장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신원이 결국 드러날 것을 우려해 기사를 게재하지 말라고 학생들에게 지시했고, 양측의 갈등은 소송으로 비화해 사건이 연방 대법원에까지 올라갔다. 대법원은 교장이 교육적 목적을 위해 ‘파란 연필‘로 기사를 ‘검열’하는 것은 수정헌법 1조에 위배되지 않는다(언론자유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이 대목을 보면 영미인들은 ‘기사를 검열(또는 편집·정정·교열)’할 때 파란 연필을 사용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미인들은 아울러 ‘blue-pencil’라는 표현으로 ‘기사를 검열(또는 편집·정정·교열)하다’는 동사로도 사용한다. 이들 표현은 웹스터 사전이나 영한 사전 등에 당당히 올라 있다.



언론인 출신의 미디어 연구가 리언 시걸(Leon V. Sigal)의 저서 ‘기자들과 관리들(Reporters and Officials, 1973)’에도 ‘파란 연필’이 나온다. 시걸은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의 부장들이 (기자들이 쓴 기사에 대해) ‘마음 내키는 대로 정정(free-handed blue-pencilling)’한다면 기자들의 불만을 살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 대목을 보면 1970년대 미국 신문사 편집국의 부장들이 파란 연필로 기자들이 쓴 기사를 자신의 입맛 대로 가감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동시에 자신의 기사에 손을 대는 부장을 좋아하는 기자가 없다는 점은 양의 동서를 넘어 보편타당한 진실임을 덤으로 알 수 있다.



필자는 영미인의 파란 연필에 대응하는 것이 우리의 ‘빨간 볼펜’이 아닐까 생각한다. 요즘처럼 컴퓨터 기사 작성이 자리잡기 전까지는 우리네 신문사의 부장들은 기자들의 기사를 다듬기 위해 빨간 볼펜을 사용했다. 그들은 빨간 볼펜으로 원고지에 쓴 기자들의 글을 지우거나 새로운 글을 써넣었다. ‘빨간 볼펜’은 편집국내에서 기사를 손질하는 부장이나 차장을 가리켰다.



컴퓨터 기사 작성이 일상화된 요즘 사무실에선 빨간 볼펜을 보는 것이 꽤 어렵다. 요새 기자들은 컴퓨터로 작성한 기사를 밖에서 회사로 전송하고, 부장·차장들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 들어온 기사를 손질하고, 최종적으로 단추를 눌러 전송한다. 우리는 기사작성과 전송이 기계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때문에 기술이 정교하지 않은 컴퓨터 시스템으로는 부장이 기자의 기사를 어떻게 고쳤는지 알아내기 쉽지 않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후배들의 기사를 전화로 받고 선배들과 후배들이 원고지를 통한 간접 대화를 나누던 시절이 좋았다”며 과거를 그리워하는 나이 많은 언론인들도 더러 있다. 말하자면 ‘빨간 볼펜’은 끈끈한 정이 있던 예전의 한국 언론계 문화를 생각나게 한다.



파란 연필과 빨간 볼펜에 관한 얘기가 나온 김에 필자는 ‘데스크를 본다’든가 ‘데스킹한다’ 따위의 국적없는 표현에 반기를 들고 싶다. 우리는 왜 ‘파란 연필’의 용례처럼 ‘빨간 볼펜을 휘두른다(사용한다)’는 운치있는 표현을 쓰지 못하는가. 이것을 양보하더라도 한국 기자들은 왜 ‘기사를 손본다’ ‘기사를 (매)만진다’ ‘기사를 손질한다’ ‘기사를 다듬는다’ 등 다양하고도 아름다운 우리 말 표현들을 사용하지 않는지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설원태 경향신문 여론독자부장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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