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말한다. “영남에 맛있는 요리가 있어?” 때론 이런 말도 덧붙인다. “거긴 한국에서 제일 먹을 게 없는 도시들이야.” 과연 그럴까? 호남에서 4년, 서울에서 18년, 나머지 시간을 영남에서 살고 있는 필자로선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뭔가 말하고 싶은 열망에 몸이 들썩거린다.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은 그런 이유에서 발원한 졸고다. [편집자 주]
2025년 10월 말. 경상북도 경주가 시끌벅적했다. 21세기 ‘지구 위 최강 2개국’이라 불리는 미국과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라의 옛 도읍 서라벌을 찾았다. 인근 김해공항에서부터의 비까번쩍한 의전과 그들이 머문 숙소 주변 경호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유명 인사가 왔다 가면 무성한 뒷이야기가 필연적으로 남는다. 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경주를 찾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특별하게 제작된 신라 금관 모형과 무궁화대훈장을 선물 받고 입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트럼프는 누구보다 황금을 좋아하는 인간이고, 금관 모형과 훈장 제작엔 수백 돈의 싯누런 금이 사용됐으니.
경주 APEC 회의에선 트럼프의 ‘소박한(?)’ 음식 취향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한국 대통령과의 회담을 마친 그는 숙소인 힐튼호텔로 돌아가 ‘치즈버거’를 가져오라고 요청했단다.
“채소는 따로, 베이컨은 빼고, 토마토케첩 많이~‘라는 구체적 요구가 비서실로부터 있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주문이다. 곁들일 콜라는 미국에서부터 공수했다고.
시간이 흘러 트럼프가 지금보다 더 늙었을 때, 그는 한국 경주와 거기서 열렸던 APEC을 늘상 즐기던 ‘치즈버거’를 재차 먹었던 도시로 기억할까? 만약 그렇다면 딱하기 그지없다. 경주는 ‘한국 스타일’로 먹을 게 지천인 도시인데.
제 나라는 물론, 주변 국가들에까지 정치·군사·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통령이나 총리도 결국은 인간이다.
인간이 자신이 사는 공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여행(그게 전용기를 사용한 국빈 방문이건, 좁은 이코노미석을 이용한 가난한 사람의 해외여행이건)을 떠나는 건 도착한 여행지의 낯선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화제를 바꿔보자. 어느 곳이라 특정할 것 없다. 신문사의 사진기자는 이른바 ‘맛집’을 많이 알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을 1년 365일 떠돌아다니며 혼자 식당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경상북도에서 발행되는 신문의 사진기자는 북쪽으론 영주와 안동에서부터 남쪽으로는 경주와 포항, 때로는 푸른 물결 출렁이는 먼 섬 울릉도까지를 오간다. 직업이 그러니 어떤 곳을 지목해 “거긴 가기 싫다”고 말할 방법도 없다.
내가 일하는 신문사의 사진부장은 나보다 한 살이 많다. 대학에서도 사진을 전공한 그와 친구처럼 지낸다. 30년 가까이 경상북도 일대 사진을 찍으러 다닌 그가 경주를 수백 번 오갔을 건 구구절절 부연하지 않아도 분명한 사실.
사진부장이 내게 소개한 ‘숨겨진 경주 맛집’이 몇 곳 있다. 쫄면을 파는 저렴한 분식집에서부터 석쇠에 1등급 한우를 구워주는 제법 비싼 식당까지 프리즘이 넓었다.
가격을 불문하고 경주시 안강읍에 있는 돼지고기찌개 식당 두 곳은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의 맛을 자랑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돼지고기는 닭고기와 더불어 동서양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육류의 수위(首位)를 다툰다. 닭고기와 달리 수십억 명에 달하는 이슬람교도가 입에도 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돼지고기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이 소비된 식용 고기일 터.
17세기 초반에 출간된 의학서 ‘동의보감(東醫寶鑑)’은 돼지고기가 ‘신장의 음을 보하고 위액을 충족시키며 간장의 음혈을 보하는 작용을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보편의 상식과 달리 적당한 양을 먹는다면 몸에 나쁠 게 없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돼지고기는 소고기에 비해 가격도 헐하다. 주머니 가벼운 서민들이 즐기는 이유가 있다.
지척이라 불러도 좋을 거리에서 영업하고 있는 경주 안강의 돼지고기찌개 식당 두 군데.
한 곳은 칼칼한 고춧가루 양념을 듬뿍 넣은 붉은빛으로 매운맛을 좋아하는 이들의 혀를 유혹하고, 나머지 한 곳 식당은 얼핏 보기엔 맹물 같은 육수를 넣어 맑은 색깔의 독특함을 유지한다.
물론, 돼지고기와 채소 몇 가지를 넣은 찌개가 ‘놀라운 맛’을 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미국 돈 10달러 안팎의 싼 가격으로 맛보는 경주 안강읍의 돼지고기찌개는 각별하다. 낮과 밤 언제 먹어도 소주를 부르는 별미다. 만약 이걸 트럼프가 맛봤다면….
도널드 트럼프가 좋아하던 형은 알코올 의존증을 앓다가 죽었고, 그런 이유로 트럼프는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고 들었다. 반주 없는 돼지고기찌개는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니, 만에 하나 다시 경주를 오더라도 트럼프의 선택은 돼지고기찌개가 아닌 치즈버거일 듯하다. 경주의 애주가들은 이렇게 말하겠구나.
“안타깝다.”
[필자 소개] 홍성식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중·고교 시절.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을 외우라는 교사의 권유를 거부하고, 김지하와 이성부의 시를 읽으며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드나들었다. 그 기질이 지금도 여전해 아직도 스스로를 ‘보편에 저항하는 인간’으로 착각하며 산다. 노동일보와 오마이뉴스를 거쳐 현재는 경북매일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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