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어느 날. 서울 서대문에 위치한 대학들의 학생들이 경찰과 대치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독재정권의 끝자락을 겨냥한 지식 청년들의 몸부림이었다. 최루탄은 난사되고 지랄탄은 자욱했다. 야당은 침묵하거나 숨죽이고 있었다. 수천 명이 캠퍼스광장에 모여 시국선언문을 배포하며 시위를 해도 그 일은 단 한 줄의 기사에도 비치지 않았다. 신문 사회면 하단에 1단짜리 기사라도 나갔다면 그건 크나큰 용기였다.
엊그제 서대문의 모 대학 가을학기 개강파티는 다채로웠다. 재즈 동아리가 신선한 공연을 하며 맵시를 뽐냈다. 뉴스를 탔다. 이처럼 세상이 좋아졌고 부드러워졌다. 이런 다채로움을 꿈꾸며 수십 년 전 대학생들은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대항해 몸으로 부대꼈다.
보수적 뉴스담론을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주요 신문에 우익이라 자처하는 단체들이 극단적 표현으로 시커먼 모양새의 광고를 낸다. 광고를 보면 이미 현 정권은 북한 정권의 허수아비 수준으로 추락해 있다. 참으로 할말 다하는 세상이 되었다. 할 말이 넘쳐나 두 귀에 다 담아두지 못할 정도다. 논설을 펼치는 지면은 매일같이 권부 때리기가 일상사다. 무능한 정권이란 소리는 이제는 얌전한 표현수위다. ‘속없는 정권’에서 ‘닭갈비(계륵)정권’ ‘약탈정권’까지 다채롭다. 정권 말기로 치닫는데 어떤 매도라도 못할까.
그렇게 가슴 한 켠에 있는 말을 토해내면 속이 시원해질까. 국민의 손으로 뽑은 정권이 아무리 못나고 무능력해도 증오에 가까운 언설들을 난발하면 저널리스트로서의 기쁨이 극치를 이룰까. 그 주의주장들의 기저는 이렇다. 남의 말을 전체의 의미에 상관 않고 주장자의 의도에만 맞게 말을 끊어 내어 공격하는 논법이다. 때리고 싶은데 단어 하나 걸려들면 작심한 듯 글이 쏟아진다. 거두절미가 저널리즘의 본류가 아니다. 의도적이고 작위성이 넘치면 결국 자기 그물에 자신이 걸려든다. 그리스를 방문한 노 대통령이 동포간담회에서 “일을 많이 하면 하는 만큼 갈등도 많으니까 국내에서 시끄러운 소리 많이 들리거든 ‘대통령이 열심히 일하고 있구나’ 생각하시고, 아무 소리도 안 들리면 ‘요즘 대통령이 놀고 있구나’생각하시라”면서 “계속 시끄러운 소리를 들려 드리겠다”고 말했다. 몇몇 신문은 ‘시끄러운 소리’ 발언만 주목해 또 난타한다.
대통령이 “도둑을 맞으려니 개도 안 짖는다”라고 외부를 겨냥해 타박했다. 즉각 이 말을 공박한다. 논객들은 과거 자료를 끌어 모아 이 말의 허구성을 결박하고 이 ‘말 많은 정권’을 포박하는 일을 강화한다. 바다이야기가 아직 게이트로 번지지 않았는지 대통령의 처갓집 사촌 팔촌까지 뒤진다. 권력형 비리로 불이 번지지 않아 성이 차지 않는 특정 보도에 대통령도 지쳤는지 “나도 최소한의 자기방어를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조카 이름이 마구 떠오르는데 최소한 자기 해명 정도는 허용돼야 대통령도 숨을 쉬고 살지 않겠느냐”고 한탄한다. 최고 권부는 이처럼 내려앉아 있다. 스스로 어깨에 힘을 빼버렸다. 대통령 때리기는 이젠 뉴스가 안된다. 대통령으로 하여금 그 거대한 행정적 권한을 좋은 나라 만들기 방책에 행사하도록 구체적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뉴스다.
국민을 위해 견공(犬公)은 꼭 있어야 한다. 나라와 미래를 위해 두 눈 부릅뜬 견공이 백성의 낮과 밤을 지켜야 한다. 대통령도 언론도 국민을 위한 충복들이다. 하루 지나면 식어버릴 말싸움은 그만둘 때가 되지 않았나. 신문의 1면부터 끝 면까지 저의가 분명한 독설은 이 나라의 시스템을 혁신하는 충언으로 바뀔 때도 되었다. 작통권도 한국의 미래모델 만들기도 그렇다. 사안을 놓고 구체성의 논쟁을 하자. 상대의 말과 논리를 인정한 다음, 설득해 나가는 온유한 담론이 한국의 공론장에 들어서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