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연설과 방송의 자율

노무현 대통령의 18일 신년 시정연설 생중계 방송을 놓고 언론계 내외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대통령의 새해 연설이 황금시간대인 저녁 10시에 행해진 데다 기자회견은 별도 일정으로 잡혀있어 이번 연설은 여러 면에서 새로운 시도였다. 연설 도중 노 대통령은 양극화 해소, 사회 안전망, 일자리 창출, 사교육 대책 등 중요 이슈를 언급했고 여러 도표를 사용해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는 초청된 청중의 박수에 여유 있게 감사를 표하는 등 종전보다 호소력 있는 모습을 보였던 것 같다. 대통령의 연설은 여러 차례 치밀하게 준비하고 연습한 듯했다. 연설의 내용은 국민들의 생활에 직결된 사안들이 많아 황금시간대 편성이 적절했다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황금 시간대에 연설한 것에 대해 비판도 없진 않았다. “잘 연출된 연설”이라는 비아냥거림도 있었고 “왜 하필이면 황금 시간대에 하느냐”는 비난도 제기됐다. 방송 3사가 모두 그의 연설을 생중계한데 대해 시청자들의 ‘시청권’을 침해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이 가운데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방송시간 결정의 자율성 부분이다.



대통령 기자회견과 관련된 일부의 지적을 종합해 보면, 방송 실무자들은 광고료 비싼 황금 시간대에 `시청자를 쫓아낼(?)’ 대통령 연설 일정을 잡고, 속으로는 청와대 측에 말 못할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방송사들의 홈페이지에는 이 같은 편성에 대해 일부 시청자들의 항의 글이 다수 올랐다고 한다. 이에 대해 청와대측은 “2주전 신년연설에 관해 방송사측에 설명했으며, 방송시간은 방송사측과 협의를 거쳐 결정했다”며 방송사측의 자율적 결정임을 강조했다.



정말 자율적 결정이었나. 노 대통령은 연설에서 국제 언론 단체인 ‘프리덤 하우스’와 ‘국경 없는 기자들’이 한국의 언론 자유를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한국 언론은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으나 대안 없는 비판이나 왜곡을 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의 말처럼 한국의 방송사들이 높은 수준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우리는 3개 방송사가 동시에 대통령의 연설을 생중계한 것은 “희생과 투쟁을 통해 얻은 편집·편성권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는 지적에 주목한다.



미국의 사례를 보자. 언론과 백악관 사이가 소원하던 빌 클린턴 대통령의 초창기였다. 당시 미국의 주요방송사들은 황금시간대에 클린턴의 연설 생중계를 거부했다. 1993년 당시 3개 주요 방송사중 2개 방송사가 지지율이 낮았던 대통령의 연설에 대해 생중계 거부를 결정했다. 미국의 방송시장은 황금시간 중 단 30초의 광고에 수십만 달러를 벌 수 있다. 때문에 방송사들은 대통령의 연설이 손실을 보전할 만큼의 가치가 없으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방송을 거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기자협회보는 올 해 1월 1일자 1면 머릿기사로 “새 해부터는 언론을 상대로 당당하게 의제 설정 경쟁을 하겠다”는 참여정부와 청와대의 의지를 전했다. 대통령의 발언이 범부의 발언보다 중요성이 떨어질 리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송 3사의 동시 생중계는 대통령의 연설이 다른 프로그램을 밀어낼 만큼 의제 설정의 힘이 강했음을 반증한 것인가. 아니면 손에 쥐고 있는 편성권마저도 스스로 행사할 수 없음을 노정한 것인가. “앞으로 우리의 방송들도 대통령 연설 생중계를 거부할 정도의 진정한 언론 자유를 누리는 모습을 좀 보고 싶다”고 하면 과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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