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표지석에 숨겨진 중국의 '핵심이익'

[글로벌 리포트 | 중국] 박일근 한국일보 베이징특파원


   
 
  ▲ 박일근 한국일보 베이징특파원  
 
지난 1월14일 주중 외국 기자들을 위해 중국 외교부가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 ‘외국기자신문중심’에 통지문이 한 줄 떴다. 1월16일부터 1박2일 일정으로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과 푸순(撫順)으로 가는 취재 일정이 있으니 참여하고 싶은 기자들은 당일 오후5시까지 신청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외국 기자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추진하면서 이틀 전에 갑작스레 공지하고, 불과 몇 시간 만에 신청을 마감하는 것은 재난 사고 등 급박한 취재가 아닌 한 아마도 중국에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어쨌든 이미 불친절하기로 유명한 중국의 문화에 익숙한 한국 기자들은 기민하게 참가 신청을 했다. 무엇보다 방문 예정지가 랴오닝성 당안관(문서기록관 또는 기록보관소), 9·18기념관, 선양 연합군포로수용소, 푸순 핑딩산(平頂山)참사기념관, 푸순 전범관리소 등 주로 일본 군국주의의 만행을 보여주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9·18 기념관은 1931년 만주사변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고, 핑딩산 참사 기념관은 일제가 1932년 항일 유격대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주민 3000여명을 기관총으로 쏴 학살한 곳이다.

취재 일정은 빡빡했다. 랴오닝성 기록보관소에서는 일본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과 중국 침략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만주철도 관련 자료들도 처음 공개됐다. 이중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가 1930년대 만주국 정부의 산업부 차장(차관)으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적극 지원했고, 이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30여만명이 숨진 난징(南京) 대학살 당시 특무반을 파견해 시체 처리 업무 등을 맡았다는 문서는 단연 눈길을 끌었다.

중국 외교부는 취재가 끝난 뒤 기자들을 상대로 기사가 어떻게 나가는 지 일일이 물어보며 점검하는 이례적 모습도 보였다. 행사에 참가한 한국 언론들은 행사 주최측의 의도에 충실하게 일본 군국주의의 만행들을 크게 고발했다. 일본의 우익을 공격하는 데 있어 실로 한·중 두 나라의 공조가 관민 차원으로 확대된 셈이다.

이후 중국 외교부의 이러한 행사는 계속 이어졌다. 지난 2월에는 난징대학살피해기념관으로 40여명의 외신 기자들을 초청했고 4월에는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賓)의 안중근기념관과 일본군 731부대 유적지, 지린(吉林)성 당안관 등으로 20여명의 기자들을 다시 초대했다.

일본에게 나라까지 잃었던 우리로선 일본 군국주의의 만행을 국제 사회에 더 많이 알려야 한다는 중국의 제안에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개인적인 친분도 큰 역할을 했지만 이러한 한·중 역사 공조 분위기 속에서 하얼빈역 안중근 기념관 개관에 이어 시안(西安) 광복군 제2지대 주둔지 표지석 설치가 성사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현장을 답사하고 기사까지 썼는데도 속이 후련하긴커녕 뒷끝이 개운치 않았다. 현장에서 느낀 한·중 공조의 실상은 중국의 일방통행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이 필요해 우릴 부른 것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아베 총리 ‘덕분’에 한·중이 손을 잡고 일본 때리기를 하고 있지만 중국의 이러한 공세가 언제든 우리를 겨냥할 수 있다는 우려를 떨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중국은 일본과의 관계가 좋을 땐 우리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장소에 표지석을 설치해 달라고 요구해도 꿈쩍도 안 했다. 더구나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중은 동북공정으로 인해 갈등을 겪었다. 중국사회과학원과 동북 3성(랴오닝·지린·헤이룽장성) 관련 학술 단체 및 대학들은 2002년부터 ‘동북변강의 역사와 현재 상황에 대한 연구 과제’에서 고구려가 중국 고대의 지방 정권으로, 그 주요한 부분은 이미 중화민족으로 융합됐다는 괴변을 늘어 놨다. 동북공정은 또 고구려와 고려는 필연적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고구려와 현 남한이나 북한과도 필연적 관계가 없다고 억지를 부렸다.

중국은 ‘핵심이익’에선 전쟁불사 의지까지 드러내며 물러서는 법이 없다. 지금은 그 핵심이익이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로 집중되고 있지만 언젠가는 만주의 역사도 중국의 핵심이익이라면서 또 다시 동북공정을 들고 나올 수도 있다. 필요한 공조는 해야겠지만 안으로는 실력을 더 키워야 할 때다. 박일근 한국일보 베이징특파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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