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지명자와 '하나님의 뜻'

[언론다시보기] 문소영 서울신문 논설위원


   
 
  ▲ 문소영 서울신문 논설위원  
 
미국 연수 중이던 2005년 뉴욕타임스의 제임스 라이즌과 에릭 리치트블라우가 부시 정부에서 국가안보국(NSA)이 미국인을 무차별적으로 불법 도청한다는 정보를 확보한 뒤 무려 15개월만에 기사화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국’ 기자들 사이에선 ‘정보를 묵히면 똥 된다’고 할만큼 속보 경쟁이 너무 치열해 특종할 거리도 며칠 만지작거리다보면 낙종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1년 이상 묵혀도 특종이 되는 미국의 언론 환경은 정말 부러웠다.

그런데 최근 탐사 저널리스트 글렌 그린월드(Glenn Greenwald)가 쓴 책에 따르면 문제의 15개월은 보도통제 기간이었으니, 정론지란 평판을 얻은 뉴욕타임스가 부끄러워할 일이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뉴욕타임스의 발행인과 편집장을 백악관으로 불러 이 기사를 막는 일종의 협박성 협조를 구했다. 결국 뉴욕타임스가 부시 정부의 압력에 굴복해 핵폭탄급의 기사를 보도하지 않은 덕분에 부시가 재선에 성공했다. “언론은 지배층을 돕는 것”이라고 한 기자 정신을 잊어버린 언론인의 어록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한국 언론계에서 특정 정보의 비밀유지 기간이 짧았던 공개된 사례들이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2003년 8월 양길승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의 청주 키스나이트 향응 파문의 경우는 20여일이었다. 양 전 실장의 향응 장면을 잡은 몰래카메라(몰카) 동영상이 몇몇 언론사에 제보됐지만 언론은 침묵했다. 정치적 음모설과 사생활 침해 우려들이 고려됐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일보 법조팀이 그 사안을 7월31일 보도하기 시작했다. 동영상 제보를 20여일을 묵혔던 SBS가 그제야 같은 날 저녁 8시뉴스에 보도했다. 세금포탈과 윤락행위 혐의자와 연루된 이 사건은 참여정부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혔다. 권력형 비리 특검까지 갔지만 무혐의로 끝났으니, 사표를 쓰고 야인으로 돌아간 양 전 실장은 참으로 억울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총리후보로 지명한 문창극 전 중앙일보 부사장의 ‘2011년 온누리 교회 특별강연’은 KBS의 지난 11일 특종보도에 앞서, SBS가 하루 전인 10일 취재로 입수했다. 그런데 SBS 보도국에서 불분명한 이유로 기사를 죽이는 바람에 KBS의 특종이 된 것이다. SBS는 11일 밤 야간뉴스로 부랴부랴 기사를 내보냈다. SBS 내부에서 현재 낙종의 이유를 찾고 있다.

“일제의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문제의 동영상 폭로 이후에도 청와대의 지명 철회나 문 지명자의 자진 사퇴는 없다. 오히려 문 지명자에 대한 KBS 보도를 두고 ‘악마의 편집’ 논란이 제기됐다. ‘조선민족은 게으르고, 자립심이 없고, 남에게 신세지고 우리민족 DNA에 남아 있다’고 한 발언이 강연 전체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친일’ 프레임에 짜 넣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개신교도들은 원래 종교인들은 모든 시련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의 발언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도 변명한다. 청문회에서 밝혀져야 한다는 강한 의지다.

그러나 이 동영상 전체를 분석하며 본 다수의 국민은 여전히 KBS보도를 ‘엑기스 편집’ 또는 ‘쪽집게 편집’이라고 평가한다. 최근 문제의 1시간4분짜리 강연을 보니 ‘쪽집게 편집’에 만족하는 편이 더 나았을 뻔했다. 추가적으로 오리엔탈리즘과 친미적 사관, 강대국에 의존해 편승한 힘의 논리 등이 종교적 확신과 결합된 것을 봤기 때문이다.

문 지명자는 문제의 강연에서 주문한 6가지 중, ‘식민사관’ 논란으로 분열되는 현 상황과 관련해 첫 번째인 분열된 국민의 통합과 화합, 다섯 번째인 “한국에 지도자가 기근”이라며 미국 독립의 기초를 세운 워싱턴, 제퍼슨, 해밀턴 등과 같은 훌륭한 정치 지도자가 한국에 필요하다는 역설을 되새길 수 있겠다. 4월16일 세월호 참사를 겪은 국민은 절실하게 권력자가 아닌, 국민 통합형·화합형·공감형 지도자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문 지명자가 세월호 참사 이후의 국가 지도자로 과연 적합한가? 지난해 언론인 출신 윤창중 청와대 전 대변인의 인턴 성추행 사건에 이어, 최초의 기자 출신 총리 후보자의 사상검증으로 언론계 체면이 영 말이 아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수 있다. 그러나 문 지명자 자신의 말대로 이 모든 혼란과 시련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국민의 통합과 화해를 위해 용퇴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문소영 서울신문 논설위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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