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요? 무작정 들이대는 수습입니다"

[기자 25시] (1) JTBC 보도국 사회2부 윤정민 기자

  • 페이스북
  • 트위치

   
 
  ▲ JTBC 윤정민 기자  
 
기자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많이 무너졌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기자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데 큰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한 줄의 팩트를 찾아, 한 컷의 사진을 찍기 위해 풍찬노숙해가며 뛰는 기자들이 많다. 기자협회보는 신년기획 ‘기자25시’를 통해 치열한 취재현장, 그 속에서 사건을 파헤치고 진실을 말하는 기자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취재는 안됩니다. 나가세요!”
“코레일이 국정원입니까? 왜 얘기도 못하게 막습니까?”

새해 첫 출근부터 달갑지 않은 실랑이가 시작됐다. 철도노조 파업이 끝난 지 사흘째. 그러나 미처 꺼지지 못한 갈등의 불씨들이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었다.

지난 2일, 서울 시내 한 코레일 차량사업소. 파업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교육 프로그램의 실태를 취재하라는 지시를 받고 아침 일찍 현장을 찾은 참이었다. 노조 사무실 주변에서 조합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을 뿐이었는데, 팀장이란 사람이 나와 다짜고짜 그를 밀어냈다. 소속을 밝히고, 사전에 노조 지부장과 약속을 하고 왔다고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잠시 후 소장이 나와 “우리 작업장에선 취재할 수 없다. 본사와 협의해서 승인을 받고 오라”며 손사래를 쳤다. 결국 10분 넘게 이어진 실랑이는 “노조 사무실에서 커피만 마시고 가겠다”는 다짐을 받고 끝났다. 지부장은 “파업에서 복귀한 뒤로 본사에서 더 예민하게 굴고 있다”고 말했다.

소장과의 약속은 아랑곳하지 않고 취재를 시작했다. 노조 사무실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사람들을 붙잡고 질문을 쏟아냈다. 듣기로는 파업 참가자들을 압박하는 ‘정신교육’이 이뤄지고 있다는데, 이 사업장에선 말 그대로 직무교육만 이뤄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강의실이 비좁은 탓에 남은 직원들은 노조 사무실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당초 계획과는 사뭇 다른 현장 분위기에 취재는 제자리를 맴도는 듯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코레일 직원들의 적극적인 취재 협조였다. JTBC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면 사람들은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른 종편 같았으면 안 줬다”며 커피도 타주고, 지나가며 사과주스도 건넸다. 처음 그의 취재를 막았던 사업소 팀장도 나중엔 태도를 바꿔 “나도 JTBC 애청자”라며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하게 보도한다”고 추켜세웠다.

하지만 영상 취재만큼은 끝내 허락되지 않았다. 함께 나온 VJ는 꼼짝도 못한 채 대기하는 신세였다. “리포트가 나가야 할 텐데 촬영을 못해서 어떻게 하냐”고 걱정하자 “다 찍었어요”라고 한다.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손에 든 스마트폰으로 촬영을 했단다. 줄곧 그의 옆을 따라다녔는데 눈치 채지 못했다. 일명 ‘몰래카메라’는 촬영이 허락되지 않을 때 부득이하게 사용하는 방법이다. “정식으로 찍으면 좋은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까요.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만 하려고 해요.”

신문 같으면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기사를 쓰면 되지만, 방송 뉴스에서 영상 확보는 생명이다. 그게 방송 기자의 고충이자 또한 매력이다. 지난해 7월 중앙일보·JTBC 통합 공채 49기 기자로 입사할 당시 그의 1지망은 신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방송을 하면서 느낀 현장의 재미가 쏠쏠했다. “방송은 완전 현장 그 자체잖아요. 현장에 나가보지 않고는 기사를 쓸 수 없으니까요. 현장에서 우리만 단독 영상을 잡아냈을 때 묘한 쾌감 같은 걸 느껴요.”

“거머리라뇨? 기자는 국민을 위한 일을 하는 겁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조용하네요. 원래는 이렇지 않은데.”
긴장의 연속인 사건 현장을 누비는 대신, 적막한 철도공사 사업소를 맴도는 일정이 맘에 걸렸던 모양이다. 방송 기자 아니랄까봐 ‘그림’이 안 나오는 건 아닌지 걱정해주는 거다. “제가 너무 한가해 보여서 괜히 고생하고 있는 다른 동기들한테 피해가 가면 어떡하죠?”

하루 전까지만 해도 그 역시 사건 현장을 정신없이 누볐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은 40대 남성의 서울역 고가 위 분신자살 사건으로 마무리했다. 마침 철야근무였던 탓에 한강성심병원 응급실에서 뜬 눈으로 새해를 맞았다. 불에 타 벗겨진 피부로 지문 채취를 하는 현장을 ‘불쌍하다’는 감정 없이 관찰자적 시선으로만 바라보는 자신을 깨닫고 묘한 서글픔도 느꼈다.



   
 
  ▲ 출입처 일정이 끝났다고 해서 하루 일과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수습에겐 ‘내 일’, ‘네 일’이 따로 없다. 선배가 시키면 그게 바로 ‘내 일’이다. 내근 업무를 위해 사무실로 들어와서 그날 9시 뉴스에 들어갈 영상 제작을 돕고, 편집을 확인하고, 뉴스 모니터를 하다보면 하루가 끝난다. (사진 왼쪽이 윤정민 기자)  
 
하루 일정은 대개 오전 7시에 시작된다. 오전 8시, 오후 1시30분 하루 두 차례 ‘메모’를 하는 게 필수 일과다. 그날의 일정과 기사 발제, 온라인 기획, 타사 보도 등을 정리해 1진이나 팀장에게 보고하는 식이다. 그 외에도 수시로 메모를 작성하고, 전화와 카카오톡 채팅방을 통해 보고하거나 취재 지시를 받는다. 수습기자에게 휴대폰은 목숨과도 같다. 밥 먹을 때나 잠깐 눈을 붙이는 순간에도 손에서 휴대폰을 놓아선 안 된다.

오후 3시30분. 코레일 사업소 취재를 시작한 지 7시간 만에 철수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새해 법조팀 발령을 받아 서초동 중앙지검으로 가야 하지만, 오늘은 내근 담당이라 사무실행이다. 1주일에 한번 꼴로 돌아오는 내근 업무 때는 출입처 일과를 마치고 오후에 사무실로 들어가 그날 9시 뉴스에 나갈 영상 제작을 돕고 저녁 뉴스 모니터를 한다. 일을 마치면 밤 11시쯤 된다. 밤 9시 전에 퇴근한 건 지난 6개월 동안 딱 두 번 뿐이었다. “수습 생활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는 그의 소망은 ‘주5일 근무’다.

15시간 ‘뻗치기’ 예사…일 마치면 밤 11시

수습이 고된 이유 중 하나로 ‘뻗치기’를 빼놓을 수 없다. 기자가 되기 전엔 막연히 편하게만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죽을 맛이었다. 예비기자 시절엔 김하주 영훈학원 이사장의 영장실질심사 결과를 13시간 넘게 기다려 봤고, 지난해 말에는 조계사로 피신한 박태만 철도노조 부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하루 15시간씩 조계사 앞을 지켰다. 크리스마스도 조계사 앞에서 보냈다. 유독 추웠던 탓에 그때 걸린 감기가 아직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

윤 기자와의 두 번째 만남에도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뻗치기’였다. 지난 3일,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아들 신상 정보 조회를 요구한 혐의를 받고 있는 조오영 전 청와대 행정관의 자택을 찾아 인터뷰를 시도하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전날 법조팀 신년회로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셔 초췌해진 얼굴의 그를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만났다. 발을 동동 구르며 주위 눈치를 살피다 입주민을 따라 1층 현관으로 들어갔다. 조 행정관의 집으로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지만 역시 반응이 없었다.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많은 기자들이 발걸음을 했다가 번번이 빈손으로 돌아가는 풍경이 오버랩됐다. “제가 온 것만 오늘이 세 번째예요. 지난번엔 동기가 왔었는데 여기 경비 아저씨가 무섭게 막 쫓아냈다고 하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15분쯤 지나 경비원이 들이닥쳤다. “뭐 때문에 온 거냐. 하도 민원이 들어와서 일을 못한다”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아파트 밖으로 내쫓는다. 밖에 나와서도 한참동안 험한 말을 내뱉던 그가 “거머리 같다”고 최후의 일갈을 날리자 그때까지 침착하게 대응하던 윤 기자도 발끈했다. “거머리라뇨? 우리는 국민을 위한 일을 하는 겁니다!”

처음 이런 일을 당했을 땐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이젠 “저 사람도 일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이해하며 넘어가려 하는 편이다. “기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기자 엄마 밖에 없대요. 친구들도 별로 안 좋아해요. 사례 수집한답시고 이것저것 물어보고 하니까.”

“많이 보고 듣고 공감하는 기자 되고 싶어”

아직은 어렵기 만한 선배들과 얼굴도 자주 못 보는 6명의 동기들이 있는 보도국이 요즘 따라 더 편하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그의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여기밖에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친구들은 일상생활을 얘기하는데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얘기하고 있으니 공감대 형성이 안 된다고요. 허세가 아니라 직업 자체가 그런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처음 기자가 되었을 때 물론 기뻤지만 마냥 좋지만도 않았다. 예상치 못한 합격 소식에 “과연 내가 준비가 되어 있나” 뒤늦은 고민에 빠졌다.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06학번인 그는 졸업을 앞두고 경험삼아 중앙일보·JTBC에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했다. 평생 써본 이력서가 한 장 뿐이다. “운이 좋았다”지만, 대학 생활 4년 중 3년을 학보사에 바쳤던 그가 기자가 되는 것은 필연이었을지 모른다. “기자가 천직은 아니지만 장점이 많은 직업인 것 같아요. 먹고 사는 데만 바쁜 게 아니라 억지로라도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람도 느껴요.”

수습 초반 법조팀에서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 채동욱 전 총장 혼외자 의혹 등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며 역사의 한복판에 있음을 실감했다. 특히 내란음모 사건 공판을 쭉 취재하며 “역사의 현장을 내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기도 했다. 반면 오늘처럼 종일 ‘뻗치기’만 하다 소득 없이 돌아갈 때면 회의감도 밀려든다. 수습이 끝나면 상황이 좀 달라질까? “아닌 것 같아요. 이 일을 대신할 누군가가 생길 때까지는 계속 해야겠죠.”

6개월을 꽉 채운 8일, 그는 드디어 ‘수습’ 이름표를 뗀다. 그렇다고 당장 뭐가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전화를 받을 때 “예, 선배. 수습 윤정민입니다”라는 인사를 생략해도 된다는 정도? 당장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말진’의 인생이기에 새해 목표도 단순하다. 그냥 열심히 하는 것.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본 그대로 충실히 전해드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듣고 싶은 것만 끌어내려 하지 말고 일단 잘 듣고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기자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빨리 몸이든 마음이든 적응했으면 좋겠어요. 평생 할 일이니까요.” 김고은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