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채 업자에 놀아난 '민홍규 죽이기' 게이트

  • 페이스북
  • 트위치

   
 
   
 
만일, 우리가 어느 날 갑자기 그동안 살아온 삶 전체를 송두리 채 부인당한다면 마음이 어떨까. 금전적인 이해관계에 얽힌 가까운 제자나 지인들로부터 ‘완벽한’ 배신과 매도를 당했다면? 더욱이 그로 인해 죄 없이 몇 년째 옥에 갇혀있다면?

잘 짜인 시나리오에 의한 영화 같은 그러한 일이 실제 일어났다. 2010년 8월은 잔인했다. 국가 공권력과 신문·방송·통신 등 언론은 한 통속이 되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 사람을 사냥했다. 그것도 한국원자력연구소 비파괴검사에서 30년 이상 사용할 수 있다는 찬사에 가까운 검사결과와 ‘국가문화유산으로 영구히 남을 만한 예술성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으면서 3년여 동안 잘 사용하던 제4대 대한민국 국새와 이를 제작한 세불 민홍규 이야기다. 제4대 국새는 폐기 됐고, 민홍규는 지금 3년 가까이 구속 수감 중이다.

그는 지금도 언론계에 금도장으로 로비를 해 국새제작단 단장을 맡았고, 국새를 제작하고 남은 금을 횡령해 언론계·정계·관계에 로비했고, 원가 200만 원짜리 가짜를 ‘대한민국 다이아몬드 봉황국새’라며 40억 원에 팔려고 한 파렴치 한 사기꾼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언론이 그렇게 보도했기 때문이다. 한국기자협회는 또한 그렇게 보도한 기자에 성급하게 ‘이달의 기자상’을 시상했다.

‘국새 사기’사건이 터졌을 때 기자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2006년 제3대 국새가 제조과정에서 깨진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제작도 당초 의뢰한 홍익대 김영원 교수(조각)와 카이스트 최주 박사(주물·작고)가 아닌 조각가 이긍범과 주물공 양홍섭이 하청을 받아 만들었고, 금세공사 길명석이 금 간 국새의 틈을 도금으로 때웠다는 내용을 특종 보도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제3대 국새제작추진위원장이었던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인터뷰를 통해 현대 과학기술을 과잉 신뢰한 자신의 과오와 민홍규의 기술력에 감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취재해 보도하기도 했다.

경찰의 일사불란한 수사와 언론의 마녀 사냥식 보도, 그리고 민홍규 주변 인물들의 증언 등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기자는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는 판단 아래, 2011년 회사에 3개월간 휴직계를 내고 본격적인 취재에 들어갔다(행정안전부는 전국부 소관이라 문화부 기자가 업무 중 취재할 수가 없었다). 경찰 발표대로 민홍규가 사기꾼이라면 내가 그동안 쓴 기사를 공식적으로 폐기해야 했고, 만일 민홍규가 모함을 받는 것이라면 나라의 상징인 국새를 가지고 장난치는 세력을 뿌리 뽑아야겠다는 기자로서의 소명과 신념에서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민홍규 국새 사기사건’은 사실이 아니다. 공정보도를 위해 3년 동안의 해직과 300명 가까운 노동조합 동지를 잃고, 해직 충격으로 아버지까지 돌아가시게 한 기자의 양심과 신념, 그리고 심층 재취재하며 만난 정직한 취재원들의 증언을 종합한 결론이다. 기자는 이를 종합해 200자 원고지 1500매 이상의 원고와 100여 장의 관련 사진을 입수해 놓았다.

기자가 입수한 자료와 증언에 의하면, 금번 사건은 골프장비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업자(박○○)와 국새제작단(단장 민홍규)에서 민홍규 단장의 업무 보조로 일하던 박○웅(행정업무)·이○수(주물보 조)가 결탁해 국새를 제작해 이름이 널리 알려진 민홍규를 이용해 큰 돈벌이를 하려다 민홍규가 거부하자 민홍규를 제거하고 이○수를 국새 제작자로 둔갑시키려는 와중에, 미국산 쇠고기 파동·4대강 강행 등 잇단 실정으로 국민 신뢰를 잃은 정권이 국민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고 정치적 경쟁자인 한명숙·정동영·이미경 등 야당 거물들을 매장시키려는 정치적 계산이 맞아떨어져 벌인 ‘민홍규 죽이기’ 게이트다. 여기에 4대 국새 제작백서(의궤) 기록을 맡은 국립민속박물관 천○○ 과장(당시 직책)의 업무상 배임과 행정안정부 공직자들의 파벌 싸움, 경찰의 한 건 올리기·짜깁기식 억지 수사, 검찰과 재판부의 전통 국새에 대한 무지와 권력의 시녀 역할 등이 가져온 대형 참사다.

진실이 낱낱이 밝혀지면 지금도 공직에 있는 여러 명이 옷을 벗거나 사법 처리를 받을 수 있고, 민홍규와 기자에게 위해가 가해질 수도 있으나(실제 민홍규에게 협박과 테러가 있어서 민홍규는 기자와의 대화에서 구치소에 있는 게 테러를 피하는 데는 더 안전하다고 말한 바 있다), 늦게나마 진실을 밝히기로 한 것은 이번 사태의 원죄가 있는 가해 정권이 바뀌었고, 4대 국새 제작과 관련해 훈장을 받았다가 치탈당한 억울한 피해자를 구제하며, 야단법석 끝에 새로 만든 제5대 국새가 또 깨져 금이 갔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새삼 억울하게 유폐된 4대 국새를 명예롭게 복원시켜 국운을 다시 세우기 위함이다. 기자는 곧 ‘국새사기사건’ 백서 출판과 ‘도가니’ ‘부러진 화살’처럼 영화화를 위한 시나리오 작가와 접촉 중이다.
다음은 그동안 제기 됐던 의혹이 재취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금 횡령, 정·관계 로비 무혐의… 전통기술?
SBS와 연합뉴스, YTN이 2010년 8월 처음으로 보도하면서 민홍규를 궁지로 몰아넣은 금 횡령과 정관계 로비는 재판 과정에서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어느 언론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민홍규를 구속시키기 위해 ‘전통기술이 없는데 있는 것처럼 속여서 정부 프로젝트를 땄다’며 사기죄만을 적용해 3년형을 언도했다. 이는 순전히 민홍규의 보조였던 이○수의 진술에 의존한 것이다. 이에 민홍규는 “있는 기술을 왜 없다고 하느냐”며 “전 국민이 보는 가운데 시연하겠다”고 계속 주장했지만, 경찰과 검찰은 끝내 이를 무시하고 기자 접촉도 못하게 급히 구속시켰다.

민홍규가 국새를 직접 만들었다는 증거는 국회 국감에서 증명됐다. 박영선 의원(민주당)의 제4대 국새는 누가 만들었냐는 질문에 민홍규는 “내가 전통 방법으로 만들었다”고 증언하자, 맹형규 행안부 장관이 “그런데 왜 국새에 당신 이름을 새겼냐. 국새가 개인 도장이냐”고 추궁했다. 법원 판결대로 이○수가 만든 것이라면, 어찌 민홍규의 호와 이름이 양각되어 있겠는가. 민홍규의 진술에 의하면,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이○수와 현대 기법으로 몇 번 연습한 건 맞지만 최종 제작은 민홍규 혼자 제작했다. 1만원짜리 지폐에 세종대왕의 영정을 그린 화가의 사인이 들어갔다고 해서 화가 개인 지폐가 아니듯이, 아티스트인 민홍규의 서명이 들어갔다고 해서 폄하하는 것은 민홍규가 제작 주체임이 사실로 드러나자 맹 장관이 히스테리를 부린 걸로 판단된다.

이○수, 박○웅은 왜 거짓말을 하나
“국새제작기간 민원이 너무 많았다. 물귀신이 왜 그리 많은가. (박)○웅이는 계속 사업하자 끝없이 회유와 협박이다. 명예로 사는 자는 힘든다. ‘아니면 말고’(제 형이 YTN 기자니 시끄럽게 할 수 있단다)를 거론하며 사업하자니 힘든다. 세상은 안경 너머 보이는 대로 평가한다. 장인단 등 국새 제작과 관계한 많은 이가 섭섭하단다. 돈을 적게 주어서…내가 많이 받았단다. 모두 의식하지 말자. 경남 산청은 빛내란다. 예산은 없다. 나와 가족이 고생할 건 뻔하다. 좋은 군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종친들이 보고 있다. 초야에 묻혀 산다. 언론을 피한다….”

민홍규의 ‘비망록’(국새제작시기의 전 과정과 금전 출납, 만난 사람 등을 일일이 기록한 민홍규의 일기, 전6권) 제4권에 나오는 구절이다. 자비까지 적잖이 써가며 완벽한 국새를 만들어 납품한 그의 고뇌가 얼마나 깊었는지 엿보인다.

이에 대해 취재한 결과, 국새 제작이 끝난 후 민홍규에게는 크게 두 가지 제안이 들어왔다. 하나는 경남 산청군에서 국새를 만든 장소를 성역화해서 산청을 빛내달라는 부탁이고, 다른 하나는 ‘선생님 유명해졌으니 우리도 먹고 살게 해달라’는 박○웅 등의 집요한 협박이다. 민홍규는 일단 국새제작 장소인 산청에 짓는 ‘전각전’과 ‘등황각’ 건립 일에 집중했다. 제작단 해체 이후 수입이 떨어진 박○웅은 금도장 소개를 위해 사무실을 차렸으나 수주가 별로 없자 큰 것을 노리다 롯데백화점 다이아몬드 전시 판매와 황금골프채 사업을 기획한 것이다.

다이아몬드 봉황 국새 전시는 견본품을 보고 수주가 들어오면 맞춤식으로 제작해주는 방식인데 경찰·검찰은 사기로 단정했다. 견본품 인문(바닥)을 보면 금세 진실이 드러난다. 그곳엔 ‘세불옥새연구소장인’이라고 엉성하게 새겨져 있다. 어떤 정신병자가 그걸 40억 원에 사 가겠는가. 견본품일 뿐이다. 그걸 보고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 제작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획은 세불옥새연구소 큐레이터로 활동하던 박○웅과 롯데백화점 측이 한 것이다.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된 ‘황금골프채’사업도 박○웅이 기획한 작품이다. 박○웅은 ‘안 하면 평생 후회할만한 사업’이라며 민홍규에게 사업 참여를 설득했다. “국새를 제작한 장인이 그런 거 하면 안 된다”고 완곡하게 거부하자 애원과 동시에 협박을 가해왔다. (마지못해 해볼까 하다가, 종신계약 등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황당한 계약 조항 때문에) 결국 민홍규는 “난 안 하겠다. 그 대신 디자인은 해 줄 테니 너네끼리 해서 먹고 살아라”하고 최종 통보했다. 이후 박○웅은 민홍규에게 생활비조로 수천만 원을 요구하다 거부당하자 “선생님과의 인연은 여기까지”라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보관중)를 끝으로 연락을 끊었고, 그 후 이번 사건이 터졌다.

골프채 제조업자 박○○는 서울 대학로 인근 민홍규 집 근처까지 찾아와 황금골프채 사업을 같이하자고 종용하다 끝내 거부당하자, “주위에 애들 많다”며 또다시 협박했다. 일주일 쯤 후인 2008년 7월 9일 민홍규 내외는 차를 폐차시킬 정도의 큰 사고가 났다. 고속도로 주행 중 갑자기 핸들이 말을 안 들은 것이다. 전 날 밤 숙소였던 산청 전각전 공사장 텐트에서 인기척이 있어 몽둥이로 무장하고 밖에 나와 수색한 다음 날이다. 누군가 자동차 핸들을 일부러 고장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그 사고로 민홍규 내외는 6개월여 병원 신세를 진다.

그런데도 경찰과 검찰의 수사는 이○수와 박○웅의 진술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심지어 경찰이 민홍규와 노○용(당시 파이낸셜뉴스 기자)을 심문할 때는 옆에 배석까지 시켰다. 결국, 공권력은 민홍규의 지명도를 이용해 ‘황금골프채’를 만들어 고가에 팔아먹으려던 박○○와 박○웅, 이○수의 각본에 놀아난 셈이다.

물론 이명박정부는 민홍규가 한명숙 당시 총리와 정동영 통일부장관, 국회 문화관광위원장이던 이미경 의원한테 금도장을 만들어 주었다는 박○웅의 진술을 이용해, 정적을 곤란하게 하려는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정동기)이 서울경찰청 지능수사팀에 전화를 걸어 “돌돌 말아 올려!”라는 지시를 한 것을, 민홍규가 경찰의 심문을 받던 중 직접 들은 바도 있다.

이에 대해 모친상 때 일주일간 특별출소를 했던 민홍규는 기자한테 “어느 날 일어나 보니 하루아침에 제가 사기꾼이 되어 있네요. 제 부덕의 소치이긴 하겠지만 국새제작단 업무 보조로 고용한 친구가 자기가 국새를 주도적으로 제작했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저런 사업을 위해 해코지하는 모양입니다. 진실은 밝혀지겠지만 대명천지에 국새를 놓고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게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석불 정기호 외아들 정민조의 위증
‘국새사기사건’에서 휴발성이 가장 컸던 멘트는 민홍규의 스승이자 대한민국 초대 국새를 제작한 석불 정기호(1899∼1989)의 외아들 목불 정민조의 “민홍규는 우리 아버지의 제자가 아니다”라는 발언이었다. 언론은 이 말을 대서특필했고, 민홍규는 졸지에 스승까지 잃게 되는 처참한 신세에 놓인다.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기자는 서울에서 7시간 운전을 해 경남 울산광역시 울주군 정민조 작업장은 물론, 민홍규를 석불에 소개해준 작은아버지 민조호의 조카 민영보의 부인이 운영하는 부산 사보당 주인(이점순)을 인터뷰하기 위해 부산까지 다녀왔다.

취재 결과, 민홍규는 1977년께부터 17년 동안 석불의 문하에서 수학한 게 맞다. 이점순 증언에 의하면 당시 목불은 아버지 가업엔 관심도 없고 주색과 노름에 빠져 아버지 작품을 몰래 가져다 팔아먹는 문제아로 집에서 쫓겨나 살았다. 반면, 이미 서예 등에 기본기가 잡혀있던 민홍규는 석불 문하생으로 들어가자마자 금세 그의 마음을 얻었다. “민군아, 네가 내 아들이다”하면서 제자로 받아들인 석불은 민 영보한테 “저 놈이 영리해서 나중에 뭔가 큰 일 할 기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석불이 민홍규에게 ‘세불(世佛)’이라는 호를 내려주며 ‘오랜 수업 끝에 옥새동장 전각의 전수를 마쳤다’고 내려진 글이 아버지의 친필임은 정민조도 오락가락하다 결국 인정했다. 이는 민홍규가 자기 아버지의 유고집이자 초대 국새 제작 비법을 적은 ‘고옥새간회정’을 자기한테 보여주지 않은 것에 대한 앙갚음과 자신이 목불의 아들임에도 아버지가 민홍규를 후계자로 삼은 것에 대한 콤플렉스의 결과였다.

정민조의 민홍규 부인은 자신이 목불의 유일한 아들이자 후계자임을 인정받아 작품값을 올리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버지가 국새를 만들었는지 모른다’며 너무 나가, 민홍규는 물론 아버지 석불까지 부정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 눈치였다. 그는 민홍규를 모른다고 했으나 부산과 전주에서 열렸던 민홍규의 옥새전시회에서 ‘아버지가 나보다 사랑했던 제자’라고 축사를 한 것이 확인됐고, 경기 이천의 민홍규 작업실에 다녀간 기념사진도 확보했다.

모두 명쾌하게 해명되는 그 밖의 진실들
경찰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화제가 됐던 ‘민홍규가 언론 로비를 위해 노○용 기자한데 줬다’는 1400만원은 리베이트로 확인됐다. 국새 제작 후 박○웅과 노○용은 제각각 금도장 주문자를 물어와 민홍규한테 30%의 커미션을 받았다. 취재 결과 노○용은 3000만 원짜리 두 개를 수주한 걸로 확인됐다. 로비자금이 아니라, (불법이긴 하지만) 거래였다. 첨언하자면 영향력이 미미한 신생 경제신문인 파이낸셜뉴스 기자를 통해 언론로비를 했다는 설정자체는 언론계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한테는 개그 수준이다.

이번 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은 국새제작백서를 맡은 천○○ 당시 국립민속박물관 과장이다. 그는 의욕인지 민홍규의 전통기법을 빼내려는 의도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제작 초기에 지나치게 꼬치꼬치 캐묻다 민홍규와 말다툼을 한 후엔 기록 자체를 포기했다. 국새제작 현장에 조교 김○린을 간헐적으로 보냈을 뿐 본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국새 제작 완료 후 그는 1년8개월 동안 행안부에 ‘백서를 만들지 말자’고 제안하는 둥 시간을 끌다가 알맹이는 다 빼고 ‘현대식으로 만 들었다’는 엉터리 백서를 만들어놓곤, 이번 사건 주모자(박○웅은 천○○의 중앙대 대학원 제자)와 연계해 민홍규 죽이기에 동조했다.

이밖에 기자가 취재한 것은 매우 많으나 지면 제약상 여기서 줄인다. 자세한 것은 곧 책으로 낼 것이다. 실명이 많이 나와 명예훼손이 우려돼 소설 형식으로 바꾸느라 시간이 좀 걸리고 있다. 어쨌든 사건 발생 3년이 흘러 민홍규는 3년 만기를 다 채우고 8월 말이면 석방된다. 민홍규가 나오면 시연을 비롯해 재취재를 하겠다고 약속한 MBC PD수첩이 폐지돼 안타깝다. 이번 기회를 통해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3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한 세불 민홍규와 진흙거푸집을 이용한 전통기법으로 잘 제작된 제4대 국새가 명예를 회복해 다시 빛을 보길 바란다.

국기기록원 보존관리실 지찬호 연구원이 수년 동안 추적해 작성한 ‘대한민국 최초 국새의 복원(1)’ 마지막 문장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친다.

“현재 최초 국새의 제작 당시 기록과 기술이 있다. 대한민국 최초 국새는 세불의 손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의 모습도 다시 태어날 것이다.”
세계일보 조정진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