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면'

- 시사IN 故 오윤현 기자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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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면’.



   
 
  ▲ 시사IN 故 오윤현 편집기획팀장 (시사IN  자료사진)  
 
지난 토요일 아침. 문자를 받고 ‘영면’을 소리 내 읽었습니다. ‘오 윤 현 영 면.’ 다섯 글자가 눈에는 들어오면서도 머리로는 전달이 되지 않았습니다.


부리나케 장례식장에 달려가 ‘고인 오 윤 현’을 보아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차마 장례식장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1층 로비에 멍하게 앉아 있는 영근이를 보면서도, “아빠 어떡해”라며 말을 잊지 못하고 울고 있는 영주를 보면서도, 선배의 부재가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믿겨지지 않는 현실을 알려야 했기에 형수로부터 받아든 선배의 휴대전화. ‘혹시나 몰라 몇자 적는다’는 선배의 글을 보고 말았습니다.


1. 내게 호흡곤란, 혼수상태, 의식불량, 위험 상황이 생겼을 때 - 서울대병원 혹은 가까운 병원으로 빨리.


2. (흠, 별로 쓰기는 싫지만) 사망했을 경우->서둘지 말고, 당황하지 말고 병원 절차에 따른다. 부음은 아빠 휴대전화의 전화번호를 이용해 보낸다. 상주나 미망인이 하지 말고 믿을만한 가족이나 친구에게 부탁한다. 내용은 간단히.


그리고 선배가 직접 쓴 부고.


“호랑이해에 조용히 세상 구경에 나섰던 오윤현. 10월 1일 새벽에 편안히 돌아가셨습니다.”


선배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호흡곤란이 생길 때 연락할 연락처까지 남겨두었습니다. 자신의 부고까지 미리 써두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자신보다 늘 가족을 그리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선배의 표현을 빌면, 강원도 양구에서 사과와 젖소를 키우다가 1987년 11월 월간지 ‘샘터’ 기자가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동화작가 정채봉을 만나 글에 눈뜨고, 동화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1994년 7월, ‘시사저널’에 발을 들여놓으며 거친 세상살이를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동화책 몇 권을 낸 ‘게으른 얼치기 작가’라고 자신을 낮췄지만 선배는 진짜 작가였고 진짜 기자였습니다.


1997년 시사저널 부도. 부도가 났지만 결호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독자와 약속이 뭐라고, 시사저널 식구들은 월급 한 푼 못 받으면서 새 주인을 만날 때까지 1년 8개월간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며 책을 냈습니다. 두 아이 아빠로서 선배라고 왜 남들처럼 도망갈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아니 안했을까요? 선배는 이른 아침 신문을 배달하고 전단지를 뿌리면서 바보처럼 독자와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선배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2007년 1월 시사저널 파업. 이른바 삼성 기사 삭제 사건이 벌어지자, 이제는 한참 선배로, 뒷짐 진 채 물러나 있어도 되건만 후배들보다 앞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도 우린 6개월간 월급 한 푼 받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 형수가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는 얘기를 선배는 허허롭게 했지요. 선배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시사IN’ 창간. 초대 노조위원장을 맡은 선배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묵묵히 후배를 위해, 또 회사를 위해 돈 되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맡기 싫어하는 별책부록은 늘 선배 차지였죠. 선배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선배가 5월 어느 날, “내가 암이래”라고 말했습니다. 휴직 그리고 투병. 노동조합에서 치료비의 일부를 보태겠다고 전화를 하자, 선배는 “후배들에게 해 준 것도 없는데 받기가 그러니 안 받겠다”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미안하다”라고 했습니다. 선배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동화 속 이야기 주인공마냥 해맑은 표정을 잃지 않았기에, 선배가 훌훌 털고 일어 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믿음마저 허망하게, 선배는 후배들에게 갚지 못할 빚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죽음을 예견하며 선배가 영주와 영근이에게 썼던 글, 우리는 기억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삼촌이 되고 또 이모가 되고, 또 형이 되고 누나가 되어 선배한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겠습니다.


그리고 영근, 영주!


오윤현 선배는, 집에서는 무뚝뚝한, 내색도 잘하지 않는 아빠였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에겐 유학하는 영주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넉넉히 대주지 못해 늘 미안해하는 아빠였고, 항상 무슨 문제든 영근이 편을 먼저 들었던 그런 아빠였다.


오윤현 선배!


열여덟 영근이, 스물한 살 영주를 남기고 떠나는 길, 쉬 떨어지지 않겠지만 이제 아이들 걱정, 후배들 걱정, 회사 걱정, 세상 걱정 모두 훌훌 털고 편히 가세요. 하늘나라에서는 선배가 쓰고 싶었던 동화를 마음껏 쓰세요. ‘호랑이해에 조용히 세상 구경에 나섰던’ 선배는 영정 사진의 웃음보다 더 아름다운 선배로, 또 동료로, 또 후배로 영원히 기억 될 것입니다. 진짜 작가, 진짜 기자 오윤현으로 기억 될 것입니다.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했던 아빠 오윤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부디 편히 가시길.


2011년 10월 3일. 시사IN 후배 고제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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