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어머니' 故이소선!

[특별기고]박종률 CBS 국제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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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종률 CBS 국제부 부장대우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그래, 아무 걱정마라.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
온 몸이 숯덩이처럼 굳어가던 전태일 열사가 눈을 감기 전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나눈 마지막 대화다.

1970년 11월 평화시장 앞에서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분신항거한 전태일 열사. 가슴에 묻은 아들에게 약속했던 대로 한평생을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아온 고(故) 이소선 여사.

신영복 교수의 말처럼 전태일 열사가 우리 사회의 감추어진 얼굴을 들추어낸 ‘횃불’이었다면 이소선 여사는 노동자의 ‘빛’이었다. 41년 전 스물두살의 아들을 눈물로 떠나보내며 맺었던 피끓는 약속을 기어코 지켜낸 이소선 여사가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며 아들 곁으로 갔다.

‘어머니는 날씨가 추운 밤이면 치마를 벗어 잠자는 아들을 덮어줬고, 아들은 상의를 벗어 어머니를 덮어주며 잠을 잤다’던 모자(母子)가 41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지난 주말 이소선 여사의 소천 소식을 접한 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을 수 없었다. 나태한 삶을 살아온 나는 도저히 그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전태일 평전’등을 읽었을 뿐 이 핑계 저 핑계로 ‘희망버스’ 한 번 제대로 타지 못했던 부끄러움 때문이다. ‘정리해고는 살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비정규직 8백70만명의 절규와 애환을 진정으로 가슴에 담지 못한 죄책감이기도 했다.

주말 오후 지하철을 타고 청계6가를 향했다. 전태일 열사의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전태일 동상까지 청계천변 인도를 걸으며 ‘아름다운 청년’의 영혼을 기린 추모 보도블록들을 꼼꼼히 읽어봤다. 왼쪽에 줄지어 늘어선 많은 피복업체들을 보면서 청년 전태일을 분노케 했던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그려봤다.

그러나 시장을 오가는 바쁜 사람들은 이소선 여사의 영면을 모르는 눈치였다. 집을 나오면서 “그래도 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전태일 동상을 찾겠지…”하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이는 언론도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 방송에서 이소선 여사의 소천 소식이 ‘주말 나들이’뉴스 뒤에 놓인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신문도 진보매체를 제외하고 비중있게 보도하지 않았다.
한평생을 민주화 투사로, 또 노동자의 벗으로 살아온 고 이소선 여사의 헌신과 공로를 언론이 너무 가벼이 한 것 같다.

직업과 소명을 가진 기자들이라면 초심을 잃어서는 안된다. 다함께 언론인으로서의 자존심과 각자의 진심도 살려야 한다. 나부터 치열하지 못했던 삶을 반성하고 싶다. ‘붉은 분노’와 ‘하얀 양심’, ‘푸른색 꿈’을 항상 간직하고 싶다.

기자의 두 팔은 힘이 없는 사람들을 뿌리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끌어안기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니겠는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말처럼 1970년에 분신한 전태일의 유서와 세기를 건너 뛴 2003년 김주익의 유서가 똑같은 나라여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이소선 여사가 아들 전태일 열사와의 약속을 지켜냈다면 이제 언론이, 소명을 가진 기자들이 그 약속을 이어가야 할 때이다. 박종률 CBS 국제부 부장대우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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