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지역일간지 최초 지령 2만호

62년 동안 한국 현대사 고스란히 담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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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가 11일 ‘지령(紙齡) 2만호’라는 역사적인 날을 맞는다. 지령 2만호를 넘긴 신문은 조선일보(1986년)와 동아일보(1986년), 서울신문(2003년) 3개사뿐이다. 부산일보의 지령 2만호는 지역일간지로서는 최초다.

1946년 창간된 부산일보는 62년이 넘는 세월동안 부산·경남 지역을 대표하는 언론사로 이름을 떨쳤다. 이 기간 동안 부산일보는 광복과 한국전쟁, 4·19 혁명, 산업화와 민주화 등 격변기에 놓인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임시 수도가 부산이 되면서 전국지로 발돋움했다. AP통신, 로이터 등 해외 통신사의 주된 뉴스 공급처가 됐다. 그러나 1951년 1월21일부터 2년간 미군 기관지 ‘성조지’에 사옥시설 전부를 징발당한 데 이어 1953년 11월27일에는 부산역 앞 대화재로 사옥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부산일보는 1950년대 후반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1958년 지역 최초로 조·석간 6면 발행을 시작했으며 이듬해 9월 역시 지역 최초로 서울지사를 설치했다. 1959년 4월15일에는 부산문화방송을 인수했다.

1960년 부산일보는 한 장의 특종 사진으로 대한민국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1960년 4월12일 부산일보 1면을 통해 보도된 ‘김주열군의 시신 사진’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1980년에는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 정책으로 국제신문을 흡수, 통합했다. 1984년 12월31일에는 당시 최신 설비를 갖춘 현재의 부산 수정동 사옥으로 자리를 옮겨 ‘수정동 시대’를 개막했다.

5공화국 말기 노조를 중심으로 전 사원이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파업을 단행한 사건은 편집권 독립과 언론 자유라는 깃발을 올린 신호탄으로 기록됐다.

90년대 초반 워싱턴·도쿄 등에 특파원을 파견하고 해외신문과 자매결연을 맺는 등 성장 가도를 달리던 부산일보도 1997년 외환위기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기구 개편과 인력 감축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이후에도 인터넷 등 뉴미디어의 등장과 공세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부산일보는 부일여성대학, 화랑대기 고교 야구대회 등 사업을 확장해 난국을 헤쳐 갔다. 2004년에는 디지털 시대에 맞게 제호를 한글로 바꾸고 서체와 심벌도 교체했다. 48면 36면 컬러인쇄가 가능한 윤전기를 도입해 빠른 시간 내에 더 좋은 지면을 인쇄하는 시스템도 구축했다. 경영난 등으로 2007년 다시 구조조정의 한파를 겪은 부산일보는 이번 지령 2만호를 맞아 고통의 시대를 단절하고 동남권 대표 신문을 넘어 전국 단위 신문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하겠다는 포부를 다지고 있다. 곽선미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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