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과거와 말 장사하는 언론

  • 페이스북
  • 트위치

   
 
  ▲ 남재일 세명대 교수  
 
십수년 전 신문부수 공시제도(ABC) 도입을 두고 신문사간 찬반 논란이 격심했던 때다. 출근하자마자 부장이 불러 신문을 하나 던져주었다. D 신문이었다. ABC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의 기획기사가 실려 있었다. 전날 나온 J 신문의 ABC 찬성론에 대한 일종의 반박이었다. 내가 일했던 신문은 D 신문의 반대론에 힘입어 그날 아침 서둘러 반대 입장을 표명하기로 한 참이었다. 부장은 D 신문을 참조해서 기사를 급조하라는 주문을 했다. 나는 D 신문을 참조해 적당히 기사를 엮었다.

문제는 인터뷰였다. ABC에 반대 입장을 표명해 줄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D 신문에 반대 입장을 표명한 K 교수의 인터뷰를 적당히 그냥 썼다. 일단 기사를 넘겨 놓고 신문이 나오기 전에 K 교수에게 전화를 걸 참이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조교가 “어제 미국 가서 일주일 있다 오십니다”고 했다.

정확히 일주일 뒤 K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D 신문에 반대 입장을 표명해서 J 신문으로부터 협박에 가까운 항의를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다시 그런 인터뷰 내용을 허락도 없이 실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다. 언론중재위에 제소하겠다고 했다. 나는 사죄했고 K 교수는 그냥 넘어갔다. 아마 제소했어도 내가 회사에서 받는 불이익은 없었을 것이다. 회사의 운명이 걸린 일이었고, 나는 그냥 악역을 맡은 것이니까. 별 죄의식도 없었다. 어차피 인터뷰는 원하는 정보만 도려내는 것이 관행이었으니까. 나는 그만큼 터크만이 ‘인용부호의 현명한 사용’이라고 완곡하게 지적한, 인용을 빌려 자기주장을 하는 잘못된 관행에 절어 있었다.

요즘은 내가 이 잘못된 관행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될 때가 종종 있다. ‘전문가 인용’이 필요한 기자들의 인터뷰에 응하는 것은 사실 귀찮고 삶에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래도 웬만하면 성실하게 얘기하려고 노력한다. 나 역시 마감을 앞두고 급한 마음으로 인터뷰 대상을 찾아 열심히 전화를 해댄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뷰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점점 응하기 싫어진다. 유쾌하지 못한 기억 때문이다. 길게 떠든 얘기를 한 문장으로 인용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초점이 어긋난 것까지도 참을 만하다. 그런데 어떤 기자는 내 말을 이상하게 각색해서 정치적 입장을 바꿔 놓기도 한다. 제자인 모군은 인터뷰를 하지도 않고 평소의 내 생각을 헤아려 과거 내가 했던 수법을 그대로 실천한 적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용 관행은 크게 변한 게 없어 보인다.

직접인용은 취재원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하고 기자의 의견을 배제하기 위한 장치이다. 그런데 현실은 취재원의 이름을 빌려 기자의 의견을 전하는 장치로 전락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촛불집회로 언론사간의 정치적 입장의 대립이 첨예해지면서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하는 ‘인용의 왜곡’은 한층 심화됐다. 얼마 전 J 신문 기자가 전화를 했다. “다음의 아고라에서 의견형성 과정을 조사해 보니 1%가 전체 발언의 30%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거였다. 아마 ‘익명화 된 인터넷 상에서 집단 동조현상이 심해서 의견 형성이 소수에 의해 지배될 수 있다’는 내용이 필요한 것 같았다.

나는 인용하지 말고 참조만 하라는 전제 하에 “소수 매체의 소수 에디터가 의제 설정을 하는 것보다는 아고라의 의견 형성과정이 민주적”이라는 요지의 의견을 전했다. 다음날 기사는 내 예상대로 ‘아고라 의견 형성 소수가 주도’라는 프레임으로 나왔다. 내가 인터뷰를 했어도 기사 어딘가에 한 문장 비슷한 취지로 인용됐으리라. 그런데 어디 이 기사뿐이랴! 취재원의 등 뒤에 숨어서 자기주장을 일삼는 위선의 수사학을, 문제는 시민들이 더 이상 속아 주지 않는다는 거다. ‘말 장사’인 언론이 말의 진정성을 의심받으면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더 정교한 수사학이 필요하거나, 말의 진심이 필요하거나! 남재일 세명대 교수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