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싹´ 언론이 자르나

화학상 "한국인 유학생 실수"보도, 당사자 "내가 발견"반박...대부분 무관심

대부분의 언론이 무관심하게 지나친 노벨화학상 수상 과정에 일부 언론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올해 노벨화학상 공동 수상자 중 한 사람인 시라카와 일본 쓰쿠바대 명예교수. 시라카와 교수는 67년 도쿄공업대학 연구원 재직 당시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을 발견한 공로로 이 상을 받았다.

그러나 몇몇 언론이 한국 학생의 실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도한 이 발견의 뒷얘기에는 후일담 이상의 사실이 담겨있었다. 언론 보도에 언급됐던 당시 한국 학생은 전 원자력연구소 방사선연구실장 변형직 박사. 변 박사는 67년 당시 시라카와 박사와 같은 연구원 자격으로 도쿄 공업대에 재직했다.

경향신문은 12일자 2면에서 실험 당시 규정치의 1000배나 되는 촉매제를 넣어 전도성 고분자를 ‘처음’ 발견한 변 박사의 ‘실수’를 소개했다. 기사를 쓴 이은정 기자는 시라카와 박사가 미국의 교수들과 만나 이 ‘실수’를 함께 연구해 노벨화학상을 공동 수상하게 된 경위도 함께 보도했다.

이 기자는 “수상자가 일본인이어서 한국인과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후속 취재에 나섰는데 이틀간의 취재가 끝날 무렵에야 변 박사의 얘기를 들었다”면서 “최초 발견자가 변 박사라는 사실은 고분자학계에서 널리 알려진 얘기”라고 전했다. 중앙일보는 경향신문 초판 기사를 받아 시내판부터 이를 기사화했다.

SBS도 이 날 저녁 8시뉴스에서 변 박사의 주장을 보도하고 시라카와 박사측의 주장에 의혹을 제기했다. 12일 변박사를 취재할 계획이었던 일본 N-TV와 후지TV 등은 SBS가 취재 중인 변 박사의 주장을 듣고 취재일정을 취소했다.

변박사는 당초 시라카와 교수의 수상 소식을 듣고서도 양국 고분자 학계의 관계 때문에 SBS와의 인터뷰를 망설인 것으로 알려졌다. 변 박사를 인터뷰에 나서게 한 것은 다음 날 아침 조선일보 기사.

11일 밤까지도 언론과의 접촉을 고사하던 변 박사는 12일자 조선일보 ‘한인 유학생 실수에서 출발’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고 SBS와의 인터뷰에 나섰다. 조선일보는 이 기사 말미에서 “세기적 발견의 원인 제공자는 의외로 한국인이었다”고 짤막하게 소개하는 데 그쳤다.

박정훈 조선일보 도쿄특파원은 “시라카와 박사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일본 언론의 보도 내용을 충분히 듣고 썼으니 현지 취재와 다름없다”고 말했다.

박 기자는 또 변박사의 얘기가 빠진 데 대해 “수상소식을우선적으로 알리는 데에 치중했다”면서 당시 연구원이었던 변박사를 유학생으로 쓴 것에 대해서도 “사실과는 다르지만 신분의 차이가 기사 내용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오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같은 날 세계일보 도쿄 발 기사는 일본 언론이 언급했던 한국인 얘기마저 빠뜨린 채 ‘제자 실수 계기로 노벨상 받았다’고 보도했다.

변박사를 취재한 공항진 SBS 정보과학부 기자는 “노벨상을 주는 측에서는 기록으로 남겨진 근거만을 가지고 시상한다 하더라도 숨겨진 진실을 밝히는 것은 언론의 몫”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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