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칼럼]'漢字'의 추억

"쌍길 철, 오징어 윤, 고무래 정, 인월도 유, 묘금도 유…." CTS가 도입되기 전, 한 사람은 원고를 잡고 한 사람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게라’를 읽던 시절 얘기다. 당시는 교열볼 때 喆, 允, 丁, 兪, 劉 같은 한자를 정식 훈 대신 글자 형태를 따서 이처럼 편하게 불렀다. 대략 10여년차 이상 된 기자들, 특히 교열기자들에겐 잊을 수 없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말들이다. 아마도 탱크 설(卨)이 몇 해 전 마지막으로 이런 유의 말에 추가된 듯하다.

요즘은 신문에서 한자가 많이 사라졌고, 기사가 온라인으로 흐르다 보니 따로 이들을 부를 이유도 없어졌다. 그 대신 지금은 영어가 넘쳐난다.

한자의 자리를 영어가 대체했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그 전에는 신문에서 ‘구축(驅逐)효과’라는 말을 썼는데, 언제부터인지 ‘구축효과(Crowding-out Effect)’가 눈에 띈다.

최근엔 ‘연착륙(소프트랜딩)’이란 표기도 보인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외래어를 쓰는 방식인 ‘외래어(우리말 설명)’과는 반대의 꼴을 취하고 있는 게 특이하다. 보통 괄호속 말이 의미를 정확히 나타내거나 어려운 것을 풀어주기 위해 쓴다는 점에서 이런 표기의 등장은 여러 해석을 낳는다. 물론 과거에는 ‘연착륙(軟着陸)’ 또는 ‘소프트랜딩(연착륙)’ 식으로 적던 것이 영어가 많이 쓰이면서 등장한 형태일 것이다. ‘연착륙’이란 말 자체가 보통명사화해 가는 과정에서 ‘소프트랜딩’과 세력적으로 경합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신문에선 연례행사처럼 ‘올해의 말’들을 쏟아낼 터이다. 교열기자의 눈에는 단연 ‘코드’와 ‘로드맵’이 먼저 들어온다. 정부에서 선창하고 언론이 전파한 말이다. 거기다 몇 해 전부터 이어져온 각종 ‘-게이트’는 올해도 여지없이 이어졌다. 수많은 ‘게이트’가 있었는데 실체는 기억나는 게 별로 없으니 아마도 주술성이 담긴 말인 것 같다. 무엇보다도 올 한해 내내 방황한 말로는 ‘나이스-네이스’를 빼놓을 수 없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이란 공식 명칭과 함께 언어 헤게모니를 다투던 이 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엔이아이에스’라는 말까지 낳았다. 국가대표 축구감독 이름을 대부분의 신문이 ‘코엘류’로 적는 가운데 한 신문에서 ‘쿠엘류’를 고수할 수밖에 없었던 사례도 기억에 남는 작은 사건이다.

신문언어는 여전히 자리잡지 못 하고 방황하다 또 한 해를 보내게됐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는 게 더 곤혹스럽다. 차라리 “쌍길 철, 오징어 윤…” 하던 때가 더 낫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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