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린 유출 없었다는데… 왜 취재를 멈출 수 없었을까

[지역 속으로] '평택 미군기지, 시대의 안전을 묻다' 취재기
박명호 중부일보 뉴스콘텐츠팀 기자

7월28일 오후였다. 경기도 평택시 안전총괄부서에 다급한 신고가 들어왔다. 미군기지 안에서 백린이 유출됐다는 내용이었다. 평택시는 경찰을 통해 이 소식을 전달받았다.


언론의 관심은 곧바로 ‘백린 유출’에 쏠렸다. 지역언론은 물론 중앙언론까지 유출 여부와 평택시의 대응을 앞다퉈 확인했다. 신고 접수 후 30여 분이 지나 재난문자가 발송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늑장 대응’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나 역시 처음에는 ‘백린이 실제로 유출됐는가’에 관심을 뒀다. 하지만 미군 측이 백린 유출은 없었다고 발표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대부분의 언론도 후속 보도를 이어가지 않았다. 결과만 놓고 보면 사건은 한바탕 소동으로 끝난 듯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백린이 아니면 정말 끝난 것일까.

중부일보는 8월17일 1·3면 보도를 시작으로 6회에 걸쳐 ‘평택 미군기지, 시대의 안전을 묻다’ 기획을 보도했다.

◇평택시 상황 보고에서 시작된 의문
취재의 출발점은 평택시가 언론에 제공한 사고 당일 상황보고였다. 기자들의 확인 전화가 잇따르자 평택시가 신고 접수부터 상황 확인, 재난문자 발송 등 당시 대응 과정을 시간대별로 정리해 제공한 자료였다. 시간표를 따라가면서 다른 질문이 생겼다. ‘미군기지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평택시는 미군 측에 직접 확인할 수 있는가.’ 당연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취재를 시작해보니 상황은 예상과 달랐다.


평택시는 사고 내용을 경찰을 통해 전달받았고, 미군 측에 사고 물질과 유출 여부, 규모 등을 즉시 확인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주민에게 대피를 안내해야 하는 지방정부가 정작 사고 현장의 상황을 가장 먼저 확인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그 순간 취재의 방향을 바꿨다. ‘백린이 샜는가’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누가 가장 먼저 알고, 누가 확인하는가’로 질문을 넓혔다.


또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 사고가 발생한 오산 미 공군기지와 평택시는 20년 가까이 지역운영위원회(OSCAC)를 운영해왔다. 그렇다면 이 협의체는 긴급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왜 사고 당일 정보는 미군기지에서 평택시로 직접 전달되지 않았을까. 확인할수록 평상시 지역 현안을 논의하는 협의체와 사고 발생 때 즉시 정보를 공유하는 긴급 소통체계는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고 다음 날 평택시 관계자와 전문가 등이 미군기지 안에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했지만 현장 확인에도 한계가 있었다.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환경 관련 협의에서도 지방정부의 참여에는 제약이 있었다. 주민에게 대피를 안내할 책임은 지방정부에 있지만, 정작 사고를 확인하고 조사할 정보와 권한에는 제약이 있는 구조였다. ‘주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지방정부가 사고 현장의 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무엇을 근거로 주민에게 대피를 안내할 수 있을까.’ 취재를 계속하게 만든 질문이었다.

7월 평택 미군기지에서 백린 유출 신고가 접수된 이후 기지 주변의 위험 요인과 대응 체계, 주민들의 목소리를 담은 보도였다. 사진은 8월18일자 중부일보 1면 보도(사진 왼쪽). 7월28일 평택시가 공개한 K-55 미군부대 내 화학물질 누출 사고 발생 보고서. /평택시 제공

◇‘평택만의 문제’서 ‘지역의 안전’으로
취재 범위는 해외 사례로 넓어졌다. 독일과 일본의 미군기지 주변에서 외국군 기지와 지방정부, 소방·경찰 등 지역 관계기관이 사고 정보를 어떻게 공유하고 대응하는지 살폈다. 핵심은 미군기지의 존재 자체가 아니었다. 기지가 지역사회 안에 있다면 사고가 발생했을 때 지방정부와 주민의 안전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문제였다.


국내에서도 과거 미군기지 사고 때 지방정부가 SOFA 관련 현장조사에 참여했던 사례가 확인됐다. 지방정부의 참여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백린 유출’ 신고 한 건은 미군기지와 지방정부 사이의 안전 소통체계를 들여다보는 취재로 바뀌었다.


이번 취재에서 가장 경계한 것은 이 문제를 한·미 갈등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평택은 이제 주한미군의 핵심 기지가 자리한 도시다. 도시와 주민의 권리도, 지방정부의 안전 책임도 과거와 달라졌다. 그렇다면 안전체계 역시 달라져야 한다.

7월29일 오후 1시 오산AB 미군기지 정문 앞에서 ‘평화주권행동 평화너머’ 회원들이 백린유출 규탄 기자회견을 마치고 미군기지를 향하여 ‘주민 생명을 위협하는 백린 누출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중부일보 제공

기획 보도 이후 국회와 평택시의회에서 후속 논의가 시작됐다. 미군기지 사고 때 지방정부가 신속하게 정보를 공유받을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나왔고, 평택시도 미군 측과의 소통체계 구축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취재를 시작할 때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백린은 정말 샜는가.’ 취재를 마칠 때 남은 질문은 달라졌다. ‘다음 사고가 발생하면 누가 가장 먼저 알고, 누가 확인하고, 누가 주민에게 알릴 것인가.’

박명호 중부일보 뉴스콘텐츠팀 기자.

돌이켜보면 이번 취재는 백린 유출 사건을 끝까지 파고든 취재가 아니었다. 다른 언론들이 ‘백린 유출 없음’이라는 발표와 함께 취재를 멈춘 곳에서 다시 질문을 시작한 취재였다. 사고는 기지 안에서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고로부터 주민을 지키는 일은 기지 밖 지역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


이번 취재를 통해 확인한 것은 거창한 갈등이 아니었다. 사고가 났을 때 공동대응을 위한 ‘소통체계’가 있는가. 어쩌면 주민 안전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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