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제작과 편성의 자율성을 보호하기 위해 국회가 의무화한 편성위원회 제도가 오히려 종사자를 압박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가 최근 편성규약 제·개정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방송사에 시정명령을 예고하면서다. 아직 편성규약을 고치지 못한 일부 방송사들은 이번 시정명령을 계기로 종사자 측에 합의를 독촉하고 있다. 종사자들이 요구해온 보도책임자 임명동의제를 뺀 채 규약부터 서둘러 만들자는 논리다.
지난해 8월 시행된 개정 방송법은 지상파 방송사와 종합편성채널, 보도전문채널에 10명의 노사 동수 편성위를 설치하도록 의무화했다. 이후 올해 5월 방미통위가 세부규칙을 만들면서 MBC와 15개 지역MBC, EBS, 연합뉴스TV, 채널A, JTBC, MBN, TV조선 등이 편성규약을 제·개정했다. 이 중 보도책임자 임명동의제가 의무화된 MBC와 EBS는 관련 규정을 편성규약에 넣었고, 15개 지역MBC 역시 임명동의제를 담은 편성규약을 6~9월 개정했다. 기술국장 임명동의제 포함 여부를 두고 최근까지 갈등을 빚었던 MBC경남도 6일 편성규약 개정에 합의했다.
같은 날 SBS도 편성규약에 보도책임자 임명동의제를 담기로 노사가 뜻을 모았다. 애초 단협에 관련 내용이 있었음에도 회사의 거부로 논의에 난항을 겪었으나 최근 사측이 이를 수용하면서 ‘임명동의제 대상과 방법, 절차 등은 SBS 단협에 따른다’는 문구를 추가하기로 합의했다. 이대욱 전국언론노동조합 SBS본부장은 “SBS 편성규약이 지역 민방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저희는 임명동의제를 무조건 넣어야 한다고 계속 주장해왔다”며 “회사가 최근 ‘6일까지 편성규약을 공표하지 않으면 시정명령을 내리겠다’는 방미통위 연락을 받은 뒤 노조 안을 받겠다고 하더라. 일단 문구를 넣어놓고 나면 지역 민방 노조에서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남은 방송사들이다. 현재 편성규약 개정이 이뤄지지 않은 곳은 KBS와 YTN 및 9개 지역 민영방송이다. 이 중 JIBS제주방송은 편성위조차 구성하지 못했다. 종사자 측 위원 구성은 마쳤지만 사측이 노조위원장의 참여를 문제 삼으며 8월 이후 관련 논의가 멈췄다. JIBS는 사측이 노조를 상대로 20여건에 이르는 형사고소를 제기하는 등 노사 갈등이 장기화된 곳이다.
편성위를 구성한 곳들도 좀체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KBS는 우여곡절 끝에 편성위를 구성했으나 사실상 이사 추천 문제가 쟁점이 되면서 편성규약 논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고, YTN도 사장추천위원회 구성을 둘러싼 노사 대립으로 편성위 논의가 교착 상태다. 특히 9개 지역 민방은 보도책임자 임명동의제를 둘러싼 노사 갈등으로 단 한 곳도 편성규약 개정에 이르지 못했다. 앞서 개정 방송법에 따라 임명동의제 의무화 규정은 KBS, MBC, EBS 등 공영방송 3사와 2개 보도전문채널에 한정됐다. 이 때문에 당시 지역 민방 등은 “차별적 조항”이라며 해당 규정을 보도 기능이 있는 모든 방송사로 확대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한 지역 민방 노조위원장은 “편성규약의 취지는 기본적으로 노사가 합의해 공정한 방송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라며 “그 취지에 맞게 편성규약을 제정하려면 의무화되지 않은 곳들에서도 보도책임자 임명동의제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 최근 G1방송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보도국은 대주주의 수족이 될 수 있는 부서고, 그렇기에 공정방송을 위해선 더더욱 임명동의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미 단체협약에 보도책임자 임명동의제가 있는 CJB청주방송 같은 곳들도 편성규약에 관련 내용을 포함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단협으로 보장하고 있으니 굳이 편성규약에 넣을 필요가 없다는 점, 관련 규정이 법제화되지 않았고 다른 민방들과 추세를 맞춰가야 한다는 점 등이 사측의 주된 논리다. 김동원 언론노조 정책실장은 “단협의 경우 임명동의제를 위반해도 100만원 이하의 벌금밖에 나오지 않는 반면 편성규약은 위반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며 “단협은 유효기한이 있지만 편성규약은 쉽게 바꿀 수 없다. 그런 이유 때문에 대부분의 사업자들이 임명동의제나 중간평가 같은 제도를 편성규약에 넣는 걸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방미통위는 편성규약 제·개정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방송사에 시정명령을 예고했다. 9월14일 방송사들에 사전 통지서를 보냈고 28일까지 시정명령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다만 사측이 이를 앞세워 편성규약 합의를 독촉하면서 종사자 측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역민영방송노동조합협의회 의장인 정준호 언론노조 KBC광주방송지부장은 9월30일 방미통위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사측은 방미통위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보도책임자 임명동의제가 인력 운용에 혼란을 가져오고 더 나아가 재허가를 빌미로 노조가 언론노조와 연대해 무리한 압박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며 “임명동의제를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방송을 자신들의 소유물처럼 사유화하겠다는 검은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방미통위는 편성규약이 실제로 방송 독립을 보장하는지, 보도책임자의 독립성을 지킬 수 있는지, 대주주와 경영진의 부당한 개입을 제어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방미통위는 위원 간담회를 거쳐 전체회의에 해당 안건을 상정할 계획이다. 방미통위 관계자는 “불이익 처분 전 의견 제출을 요청하기 위해 사전 통지서를 보낸 것”이라며 “어떤 행정 처분을 할지는 논의를 통해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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