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도 서로 적이지만 상호 간 존중과 연민의 정신이 발현되곤 한다. 1차 세계대전 중인 1914년 12월24일 벨기에 이푸르 전선의 ‘사건’이 대표적 예다. 그날도 영국군과 독일군은 불과 몇십 미터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밤이 되자 독일군 참호에서 전나무 트리가 세워지더니 한 병사가 캐럴을 부르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곧 참호 속 모든 독일군 진영으로, 또 영국군 진영으로 퍼져나갔다. 잠시 뒤 양측은 조심스럽게 참호 밖으로 나와 마주 섰다. 병사들 간의 ‘크리스마스 휴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를 알고 기겁한 상부의 명령으로 며칠 만에 중단되긴 했지만, 이 기간 병사들은 참호 밖에 널브러져 있던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추모식도 열었다. 양측은 서로 군복 단추나 배지를 교환하고 깡통을 엮어 축구 시합을 하기도 했다.
3년6개월을 넘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선 드라마 같은 이런 모습을 기대하기 힘들다. 범슬라브 민족이란 동질감조차 온데간데없고 양측 간 증오와 잔혹함은 시간이 갈수록 두드러진다. 더욱이 드론의 전면 등장은 대면한 적을 상대로 한 인간적 갈등의 여지도 없애버렸다. 전쟁터의 ‘자비’와 ‘연민’은 점점 더 보기 힘든 덕목이 되어가고 있다.
‘더블탭 공격(Double-Tap Attack)’은 부상 병사를 또다시 공격해 아예 살해하거나 아니면 구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2차 공격을 가해 인명피해를 증대시키는 잔혹한 전술이다. 6월 현지 취재 기간 이러한 ‘더블탭 공격’이 최전선이 아닌 민간인 밀집 지역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6월6일, 러시아의 드론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도심의 한 건물을 공격해 불이 나자, 소방관들이 도착해 진화 작업을 시작했다. 잠시 뒤엔 공습경보도 해제됐다. 그런데 그때 숨어있던 다른 드론 한 대가 나타나 이 소방관들에게 돌진해 폭탄을 투하했다. 진화 작업 중이던 소방관 3명이 숨졌다. 그때 마주한 동료 소방관들의 망연자실한 모습과 공포 어린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 공포와 함께 증오심도 커진다. 지난해 12월 이스칸데르 미사일이 눈앞에서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공습경보 해제 뒤 현장에 달려갔을 때는 이미 소방관들이 도착해 불을 끄고 있었다. 이제는 2차 공격의 위험 때문에 소방관들이 즉시 대처할 수 없게 됐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타라스 셰브첸코 대학은 그곳 젊은이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최고의 명문대로 꼽힌다. 대학생들은 전쟁이 나도 징집이 안 되지만 자원한 학생들 가운데 전사한 이들의 사진이 교내 곳곳에 붙어있다. 이 대학에는 대문호인 푸시킨과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고골의 동상이나 초상화가 걸려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이들이 우크라이나인이 아니라 러시아인이라는 게 철거 사유다. 키이우 시내 역이나 공원, 광장의 러시아식 명칭도 모두 바뀌었다.
지금은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드미트로의 러시아식 이름인 드미트리로 부르면 화를 낸다. 올렉산드라를 알렉산드라로 불러선 절대 안 된다. 볼로디미르를 블라디미르로 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단 한 글자의 러시아식 잔재도 허락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도 깊이 각인된 이 증오심과 상흔들이 과연 지워질 수 있을까.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