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란 류시화 시인의 시가 있다. 2022년 3월10일, 대한민국의 제20대 대통령으로 윤석열 후보가 당선됐다.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총장을 지냈던 윤석열은 총장직을 내려놓고 불과 일 년 만에 당시 제1야당이던 국민의힘 대선후보로 나서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 무렵 나는 MBC 라디오 ‘시선집중’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 중이었다. 사회자 김종배 씨가 내게 “새로운 대통령 당선인에게 가장 바라는 점이 있다면?”이라는 질문을 던지자, 나는 “윤석열 당선인에게 바라는 것은 ‘임기 중 퇴진’”이라고 답했다.
물론 그때 ‘임기 중 퇴진’이라고 답했던 것은 대단한 탁견이 있어 2024년 12․3 계엄이나 내란 음모를 예측했기 때문이 아니다. 지난 20세기 민주화운동의 산물이던 헌법을 개정해 21세기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 시대정신이란 의미였다. 정권교체가 아닌 정치개혁, 새로운 헌법의 탄생을 위해선 신임 대통령이 먼저 자신의 임기를 단축하는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고, 정치 신인에 가까운 대통령 당선인이 그나마 성공한 대통령으로 후대에 기억될 가능성이 있다면, 헌법 개정을 위해 자신의 임기를 단축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를 지지하거나 대단한 기대가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 역시 2013년 당시 수원지검 여주지청장이던 윤석열 검사가 국정감사에서 “저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습니다”란 요지의 발언을 했을 때, 정권이 아닌 법치주의를 따르는 강골 검사란 인상을 받았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2019년 7월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진행될 무렵, 독립언론 뉴스타파는 그간 정의로운 검사로 알려진 윤 검사가 자신에게 불리할 때는 온 국민 앞에서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렸다. 윤 후보는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뇌물 혐의로 경찰조사를 받던 윤우진 전 용산세무서장에게 변호사를 소개해 줬지만, 그런 적이 없다고 잡아떼다가 뉴스타파를 통해 통화 내용이 공개되자 ‘말을 하기는 한 모양’이라고 태도를 바꿨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 지지자들은 진실을 보도한 뉴스타파를 거세게 공격했다. 이후 벌어진 일들은 우리가 아는 대로다. 검찰총장에 오른 그는 검찰 개혁 대신, 측근들을 대거 기용해 윤석열 사단을 만들고, 이들이 장악한 검찰은 법무부의 개혁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마침내 그는 정치에 뛰어들어 2022년 3월 대통령에 당선된다. 인사청문회 당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문재인 대통령이 그를 검찰총장으로 임명했을까? 그래도 지지자들은 그를 임명하라고 외치며, 뉴스타파 후원을 끊었을까?
탈진실의 시대는 정보가 없거나 부족해서 온 것이 아니다. 넘쳐나는 뉴스 속에서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그런 소식만 들려주는 사람들 때문에 왔다. 내가 지지하는 진영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분노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런 뉴스를 전하는 메신저를 공격하고 위축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한 사람의 자연인에 불과한 언론인은 권력과 비판적 거리를 두고 다양한 담론을 전하는 언론의 의무와 보도 이후 쏟아질 비판과 책임 사이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미 미디어오늘에 보도됐던 대통령의 비공개 일정에 대한 공개적인 질문과 기자의 질문 속에 숨어있을지 모를 정치적 의도를 예단하고 비난하는 일 가운데 어느 것이 국민에게 더욱 공익이 되는 일일까?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대통령의 ‘알려지지 않은 7시간’과 윤석열의 거짓된 출근 시간만 문제일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저널리즘의 의무는 권력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결정의 내용과 그 의미가 무엇인지 세상에 알리고, 이를 심층적으로 취재해 공개된 사실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언론은 때로 다양한 공격과 비판에 노출되고 그로 인해 책임을 져야 한다. 왜냐하면 언론과 기자 역시 보통 시민의 입장에선 또 하나의 권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기자가 되고, 동시에 독자인 시대에 우리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세상에 무지한 자의 진심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고 했는데, 지금은 우리의 진심이 가장 위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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