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폭염이 오기 직전 스포츠계는 불볕더위를 먼저 맞았다. 프로축구 기성용의 포항 이적 건 덕분이었다. 이적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이적으로 인한 후폭풍도 거셌다. 선수는 서운함을 내비쳤고, FC서울 팬들의 분노는 구단 사무실과 훈련장을 넘어 본사로까지 향했다. 구단은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뒤늦게 이적 전 마지막 경기에서 기성용이 팬들에게 인사하고 간담회도 열면서 성난 팬심은 조금 사그라졌지만, 모두 씁쓸한 뒷맛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2년 전 프로야구 SSG 김강민의 한화 이적에 이어 이번 기성용의 이적까지, 스포츠에서 ‘낭만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은 피부로 체감되고 있다. 한 팀에서만 뛰는 ‘원클럽맨’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고, 오랫동안 팀의 상징이었던 선수들을 은퇴식은커녕 그라운드에서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떠나보내는 일도 많다. 승리와 성적, 그리고 이와 연결되는 재정이라는 정량적 가치가 중요해진 현대 스포츠에서 낭만이라는 비정량적 가치를 챙기기에는 매일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
그런데도 모두가 함께 낭만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스포츠가 현실의 고달픔을 달래주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승리가 주는 카타르시스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일깨워주는 소속감, 부모와 연인의 애정에 버금가는 맹목적인 믿음까지. 구단과 선수, 팬을 한 경기, 한 시즌 승리와 성공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뛰는 운명 공동체로 만들어주는 게 스포츠다. 그리고, 스포츠가 주는 낭만으로 우리는 고달픈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또 하나의 힘을 얻는다.
낭만을 지키기 위해서는 운명 공동체끼리 좀 더 세련된 방식의 소통이 필요하다. 구단과 선수가 밝혀야 할 어떤 게 있다면 구단과 선수는 함께 그 방식과 시점을 빠르게 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알렸을 때 팬들과 외부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어떤 식으로 알릴지에 대한 고민도 반드시 필요하다. 보도자료와 입장문으로만 알리기엔 너무나도 다양하고 좋은 플랫폼들이 많다. 레거시 미디어와 함께 SNS 미디어 플랫폼을 적극 활용하는 구단들도 많아지는 만큼 구단과 선수도 여러 플랫폼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팬들 역시 ‘승리’라는 공동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는 버스 막기 등의 위험한 물리적 소통 말고 성숙한 응원 문화를 보여줘야 한다.
그런 점에서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 김재호의 은퇴식은 ‘현대판 낭만’의 방향을 보여줬다. 구단은 왕조를 만들어준 선수를 예우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그라운드에서 후계자에게 유니폼을 넘기는 퍼포먼스 등으로 배려했다. 그리고 구단과 팀 사정에 맞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줬던 베테랑, 그런 선수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빛내준 따뜻한 팬심까지. ‘어떻게 하면 더 멋지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서로를 배려한 행사라는 게 느껴진, 멋진 마무리였다. 운명 공동체가 모두 낭만을 잊지 않는다면, 스포츠는 언제나 그랬듯 승리의 기쁨과 감동으로 보답해 줄 것이다.
최형규 MBN 문화스포츠부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