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규 방송통신위원회 부위원장이 1일 면직되면서 5인 정원인 방통위엔 이진숙 위원장 한 명만 남게 됐다. 이동관 전 위원장 시절부터 만 2년 가까이 비정상적인 2인 체제로 운영돼 온 방통위가 이제는 의사정족수도 안 되는 1인 체제가 되면서 회의조차 열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미 방통위는 4월23일 회의를 끝으로 한 번도 전체회의를 열지 않았다. 1월23일 이진숙 위원장이 탄핵안 기각으로 업무에 복귀한 뒤 4월까지 총 다섯 번의 회의를 열었는데, 이 기간 주요 의결 사안이었던 KBS 감사와 EBS 사장 임명은 법원에 의해 효력이 정지됐다. 지난해 7월31일 취임 첫날 강행했던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임명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지난 1년여 이진숙 위원장 체제의 2인 방통위는 별달리 일을 하지 못했고, 그나마 밀어붙인 일들도 법원에 의해 제동이 걸려 ‘헛심’을 쓴 셈이 됐다는 거다.
그런데도 김태규 전 부위원장은 방통위를 떠나며 감회가 남달랐던 것 같다. 이재명 대통령이 면직안을 재가한 1일 그는 방통위 내부망에 ‘사랑하는 방송통신위원회 직원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작별 편지를 남겼다. 이 글에서 그는 “20여 년의 공직생활 중 가장 불같이 보낸 시기가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여러분과 함께한 시간”이라며 “법관 등으로 일하는 동안 그 평온했던 근무 시간이 모든 공직자에게 당연하게 허락된 것인 줄 알았다. 그것이 가늠하기 어려운 큰 특혜라는 것을 정부에 와서 일하면서, 특히 방통위에서 일하면서 알게 됐다”고 했다.
김 전 부위원장은 이어 방통위가 방송3법, 방통위법 개정 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 앞날을 예측하기 어렵다면서 “방통위가 맞닥뜨린 불행한 현실이 꼭 법률이나 그 법률에 기초해 마련된 제도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방통위가 작금의 안타까운 현실을 겪고 있는 데는 우리 정치의 현실이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고 덧붙였다. “다만 우리의 정치 상황이 좀 더 나아져 그 위에서 우리 방통위가 순항하는, 그런 멋진 부처가 되기를 바랄 뿐”이라고도 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출범한 방통위가 두 번의 정권교체에도 큰 탈 없이 유지되다 윤석열 정부 들어 파행을 거듭한 끝에 결국은 해체론까지 직면하게 된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방통위를 “불행한 현실”로 내몬 게 “정치”라면,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이 파면당한 전직 대통령에게 있음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은데도 말이다. 그는 바로 그 전직 대통령에 의해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고, 바로 이어서 방통위 부위원장까지 지낸, 전 정부의 주요 일원이었다.
김 전 부위원장은 또 “여러분의 사랑과 도움으로 ‘방송통신인’이라는 멋진 타이틀을 하나 얻었다”며 방통위 직원들에게 감사 인사도 전했다. 그러나 만 11개월, 실제로는 10개월 정도 방통위에 몸담았다고 ‘방송통신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간 공개된 회의에서 김 전 부위원장의 말과 태도를 보면 ‘방송통신인’으로서의 식견이나 전문성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그가 취임하고 열린 여섯 번의 방통위 회의 중 공개된 네 번의 회의 속기록을 보면 더 그렇다. 회의 중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은 “별 의견 없습니다” “이의 없습니다”였다. 방통위 직원의 의안 보고에 의견을 낼 때도 있었는데, 내용 자체보다는 오자와 띄어쓰기 등 자구에 대한 지적이 대부분이었다. 거의 매번 회의 때마다 그는 직원을 향해 의안서 작성 표현이나 띄어쓰기, 괄호 사용법 등을 지적했다. 3월26일 회의에선 “평생 버릇이 자구 따지는 것이라서 자구 하나하나를 따지다 보니 회의가 자꾸 리듬이 끊어”진다고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지적과 의안·정책관리팀의 노력 덕분에 “의결서가 보기가 편해졌고 좀 더 품위가 있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직 전 그의 행보도 ‘방송통신인’ 타이틀에 썩 부합하는 건 아니었다. 연합뉴스 등 보도에 따르면 김 전 부위원장은 4월 말 일신상의 이유로 사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당시는 “역대 최악”으로 꼽히는 SK텔레콤(SKT) 유심 해킹 파문이 한창이었다. 사태 발발 닷새 후 한덕수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방통위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개인정보보호위원회 등에 국민 불편 해소에 전력을 다하라고 긴급 지시까지 했으나, 방통위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이진숙 위원장은 해킹 사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정된 미국 출장을 떠났고, 김 전 부위원장은 대신 국회 과방위 전체회의에 불려 가 “무능하다”는 질타를 들었다. 김 전 부위원장이 바로 이 시기에 사의를 밝힌 게 사실이라면, 무책임하다는 비판 또한 피할 수 없다.
물론 김 전 부위원장은 그로부터 한 달은 더 직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5월 말 사의 표명 사실이 알려짐과 동시에 울산에 변호사 사무실을 냈고, 정치권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김 전 부위원장이 방통위를 떠나며 “언젠가 여러분을 다시 만날 거라는 사실에 대해 의문이 없다”고 한 건 무슨 의미였을까. 그의 판사, 변호사, 정무직공무원과 ‘방송통신인’ 이력에 ‘정치인’ 타이틀이 하나 더 추가될까. ‘정치의 현실’을 개탄하며 떠난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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