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최후의 날'과 가자지구

[이슈 인사이드 | 국제·외교] 금철영 KBS 국제부 기자

제대로 서 있는 건물들이 없다. 돌무더기의 폐허와 흩날리는 먼지 속에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 이 돌덩이들이 가루가 되길 바라는 걸까. 더 파괴될 물체가 없어 보이는데도 미사일이 날아온다. 이젠 마땅히 숨을 곳도 없다. 언제 폭삭 주저앉을지 모르지만, 무너진 건물 잔해 틈새라도 찾아야 한다.


밤이면 야간 공습이 없기를 바라면서 주린 배를 움켜쥔다. 아직 옆에는 아이들이 거칠게라도 숨을 쉬고 있다. 내일은 더 재빠른 동작으로 빈 냄비에 뭐라도 받아와야 한다. 인도적 지원이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구호품 분배 장소는 아수라장이다. 3개월 봉쇄 끝에 들어온 트럭들이다. 이재민이 190만명인데 들어오는 트럭은 500~600대다. 쇄도하는 인파와 절규 속에서 공포에 질린 구호단체 직원들이 현장에서 도망치기도 한다. 간혹 공중에서 또 지상에서 트럭들을 향해 총격이 가해지기도 한다. 테러리스트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5월19일(현지 시간) 가자지구 북부 자발리아의 급식소에 구호 음식을 받으려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난 10주간 가자지구 내 구호물자 반입을 전면 차단해 왔던 봉쇄를 완화하고 기본 식량 반입을 허용하기로 했다. /AP 뉴시스

가자지구의 일상은 ‘지구 최후의 날’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나 봤던 풍경이다. 하지만 가끔은 해피 엔딩으로도 끝나는 영화와 달리 가자의 현실에선 그런 희망조차 없다. 이 참혹한 상황에서도 자식만큼은 마지막 희망일 터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무참히 짓밟힌다. 아이를 품에 안고 절규하는 부모들의 통곡뿐이 아니다.


병원에서 응급환자를 돌보던 의사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수술대 위에서 주검으로 마주하기도 한다. 죽어가던 자식의 손조차 잡아주지 못했던 부모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학교 화장실에 갔던 13살 소녀가 이스라엘군 저격수가 쏜 총탄을 가슴에 맞아 숨지고 시신까지 훼손된 채 발견되기도 했다. 이들이 도대체 테러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팔레스타인 보건 당국은 가자 전쟁이 시작된 2023년 10월7일부터 2025년 5월 중순까지 가자지구의 주민 5만2900여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사망자의 절반은 여성과 어린이, 노약자다. 1만7000명의 어린이들은 부모가 죽거나 실종돼 느닷없이 고아가 됐다. 거리를 뒹구는 낙엽처럼 이곳저곳에서 발길에 채며 스러져가는 운명에 처한 것이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권이 가자지구의 생명체 전부를 절멸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데도 네타냐후에 동조하는 극우 성향의 한 정치인은 “적은 하마스가 아니라 가자지구의 모든 어린이”라고 태연히 말한다. 놀라운 것은 이 참상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담은 보도자료들이 끊임없이 나온다는 것이다. 왜 큰 스피커를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추악한 행위를 더 큰 목소리로 정당화하려는 것일까. 이 전쟁과 아무 관련도 없어 보이는 약자들은 비명조차 지를 힘도 없는데 말이다. 보다 못한 유럽연합의 정치인들이 이스라엘과의 진행 중인 일체의 협의를 중단하고 전 세계 언론들이 현지 취재를 통해 속속들이 참상을 전한 뒤에야 ‘네타냐후 정권의 행태를 좌시할 수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진 듯하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올메르트 전 총리까지 나서 “조국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며 네타냐후 총리를 향해선 “범죄 집단의 우두머리”라고 비판한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네타냐후를 전범으로 규정하고 체포영장을 발부한 지 오래다.


그런데도 그는 당당하다. 국제사회 비난에 미국까지 이스라엘을 ‘패싱’하는 듯하니까 인도주의 지원 재개에는 협조하고 있지만, 잿더미로 변한 가자지구를 완전히 점령하겠다는 의도는 숨기지 않는다. 그야말로 이제는 ‘쓸어버릴’ 태세다. 유럽은 물론 미국까지 나서 가자지구 재점령 계획인 이른바 ‘기드온의 전차’ 작전을 극구 만류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5월22일(현지 시간) 그리스 아테네 이스라엘 대사관 앞에서 친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대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수배자로 묘사한 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AP 뉴시스

한발 더 나아가 이번엔 요르단강 서안지구 곳곳에 대규모 유대인 정착촌들을 지으려 한다. 이스라엘 언론들에 따르면 새로 지어질 정착촌은 22곳이라고 한다.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가자지구와 함께 팔레스타인을 구성하는 핵심 지역이다. 가자지구 재점령 시도와 함께 서안지구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확대하겠다는 것은 팔레스타인 ‘절멸’의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인류 역사는 힘으로 어떤 민족을 절멸시키려는 시도가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해 왔다. 누구보다 이스라엘이 잘 알지 않는가.


이스라엘은 뛰어난 교육과 경제 구조, 나라를 지키려는 애국심과 방어시스템 등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 많은 영감을 줘왔던 나라다. 하마스의 기습 공격으로 이 전쟁이 시작됐다고 해도 이스라엘처럼 전 세계에 영향력이 있는 힘 있는 나라가 ‘고통의 연대’로 상처를 치료해 나가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더 큰 재앙을 ‘중단’시키자는 국제사회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그렇게 힘들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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