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불신 넘은 혐오 단계... 언론 폭력, 민주주의 파괴

[맞아도 싼 기자는 없다] ①이유 없이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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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성규.

기자들이 맞고 있다. 온라인 괴롭힘은 일상이고, 광장에서, 심지어 국회에서도 기자들은 폭력을 경험한다. 위협이 반복되면 취재는 위축되고, 언론의 견제·감시 기능은 쪼그라든다. 이런 현실을 진단하고 개선할 방안을 살펴보는 기획을 3회에 걸쳐 보도한다. <편집자 주>

시작은 2014년 세월호 참사였다. 몇 해 전부터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쓰이던 멸칭 ‘기레기’ 용어는 모두가 아는 말이 됐다. 그때는 기자들에게 잘못이 있었다. ‘전원구조 오보’라는 원죄에서 언론 불신이 비롯됐다.


지금은 이유가 없다. 흥분한 군중 사이에서 ‘기자다!’ 외침 한마디에 이목이 쏠리고 폭언과 폭행이 잇따른다. 어느 언론사 소속이든 상관없고 눈에 띄는 영상기자뿐만 아니라 취재기자도 신분을 숨겨야 한다. 12·3 비상계엄 이후 기자에 대한 공격은 새로운 형태로, 한층 극명하게 드러났다.

‘기자라는 이유’로 당한다

10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16년 촛불시위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특정 언론이 환호받거나 비난받는 일이 많아졌다. 기자들은 집회 현장에서 욕을 듣고 쫓겨났다. 보수 정부에서 사장이 임명된 KBS와 MBC는 영상기자들이 중계차나 카메라에 방송사 로고를 떼야 했다.


2019년 이른바 ‘조국 사태’를 거치며 양상이 달라졌다. 열성 지지자인 ‘팬덤’이 전면에 등장했다. 김창욱 한동대 교수는 “대부분의 연구에서 언론인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 시점을 세월호로 보고, 두 번째 계기를 조국 사태로 꼽는다”며 “그 이후 좌우 이념과 상관없이 ‘언론혐오’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팬덤의 효능을 확인한 한국 정치는 좌우를 떠나 극성 지지자들에게 영합하는 포퓰리즘 성향을 보였다. 동시에 언론혐오가 자라났다. 언론이 정치권과 시민 사이에서 정보를 틀어쥐고 사실을 숨기면서 민주주의를 멋대로 착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정치인이 SNS에 직접 의견을 밝히고 유튜버들이 정치를 중계하면서 언론의 지위는 위태로워졌다.


김 교수는 “언론혐오는 언론집단 전체를 하나로 보고 쓸모없는 데다 해악만 끼치는 이들이 끝내 청소되고 사라져야 한다고 느끼는 감정”이라며 “극우 집회 세력이 가장 싫어하는 언론사가 ‘우리 편’을 들지 않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인 점이 지금 현상을 설명해 준다”고 말했다. 언론의 역할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단지 기자라는 이유로 공격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1월19일 새벽 윤석열 전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되자 극렬 지지자들은 서울서부지방법원에 난입해 영장을 발부한 판사를 찾아다녔다. 이 과정에서 MBC와 KBS 등 기자들이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했다. /연합뉴스

정치권이 ‘동원·묵인’한 공격

12·3 비상계엄 이후 일련의 공격은 정치권이 지지자들을 동원하거나 묵인하는 방식으로 광장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권위주의 시절의 언론 탄압과 다르다. 국경없는기자회는 2일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를 180개국 중 61위, ‘문제 있음’ 단계로 발표했다. 낮은 점수를 준 이유에 대해 “포퓰리즘적인 정치 경향이 기자들을 향한 증오를 부추기고 있다”고 밝혔다.


포퓰리즘과 언론인 공격은 전세계가 흐름을 같이하는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독일은 올해 언론자유지수가 10위권 밖인 11위로 밀려났다. 독일 내 극우 정당의 약진과 함께 기자들이 집회 중 극우 세력에게 공격받는 일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때도 방역에 반대하는 극우단체의 언론인 공격이 잇따라 언론자유지수가 13위까지 내려갔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특정 언론을 배제하거나 무시하면서 지지자들에게 일종의 ‘사인’을 보냈다. 윤 전 대통령은 임기 중 네 번의 기자회견 동안 MBC와 JTBC에는 질문권을 주지 않았다. MBC 기자만 전용기 탑승을 불허하고 질문 태도를 문제 삼아 출근길 문답도 폐지했다. 유행이라도 된 듯 대구와 대전시장도 MBC 지역사 기자의 질문을 거부했다.


서울서부지법 폭도들은 “죽어도 괜찮아, 죽여야 돼”라며 MBC 기자를 폭행했다. 그런데도 윤 전 대통령은 2월25일 탄핵 심판 최후진술 때 “저의 구속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청년들도 있다. 옳고 그름에 앞서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다”며 이들을 두둔했다. 국민의힘도 비상계엄을 사과하거나 명확히 거리를 두지 않고 지지자들을 이용하고 있다.

유례 없는 정치인의 기자 폭행

내란을 주도한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측은 비상계엄을 옹호하는 지지자들을 동원해 언론인을 공격했다. 김 전 장관 측은 지난해 12월 기자회견을 열며 아예 우호적인 언론만 가려 받았다. “취재를 방해하는 기자회견이 어디 있느냐”며 기자들이 항의하자 기자들의 얼굴을 일일이 촬영해 온라인에 올렸고, 일부 기자는 신상이 노출돼 기자의 이력과 외모까지 조리돌림 당했다.


심지어 정치인이 직접 나서 기자를 폭행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4월1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질문하던 이명주 뉴스타파 기자를 강하게 잡아끌어 폭행했다. 기자회견 중 질문을 거부한 뒤 따라붙은 기자를 방호과에 넘기겠다면서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정치인이 공개된 자리에서 취재 중인 기자를 폭행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찾기 어렵다.


박영흠 성신여대 교수는 “뉴스타파 기자가 무례하거나 자극적이고 공격적으로 보이지 않았다”며 “이번 폭행은 의식했든 못 했든 ‘기자에게 그래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결과가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언론이 정치를 매개하던 과거에는 비판언론에도 적극적으로 해명하려 했는데 최근에는 기자들의 질문에 불편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게 쉬워졌다”고 말했다.


정치인에게는 불편한 질문을 감내하면서까지 기존 언론을 상대할 가치가 낮아졌다. 오히려 기자를 공격하면 지지가 높아진다. 박 교수는 “정치인들이 이전보다 특별히 인내심이 약해졌거나 한 게 아니”라며 “카메라가 찍고 있는 상황에서 언론을 적대하는 장면을 지지자들이 더 바라고 있기 때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뉴스타파는 4월30일 다큐멘터리 '망상자들, 내란은 끝나지 않았다'를 내놓았다. 뉴스타파는 국민의힘의 권성동 원내대표와 김문수 대선 후보, 나경원 의원, 홍준표 전 대구시장, 한덕수 전 총리를 찾아가 12·3 비상계엄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질문 막은 정치, 파렴치해진다

권 원내대표의 폭행은 정치인에게 취재에 응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결과이기도 하다. 조국혁신당은 당시 권 원내대표에게 “다소 불편한 방식의 취재라고 판단했다면 사정을 얘기하고 취재 약속을 잡으면 된다”며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의 언행은 늘 취재 대상이 된다. 그게 싫으면 정치인을 하지 않으면 된다”고 일침을 놓았다.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는 뉴스타파의 취재가 적절했고 필요했다고 평가했다. 뉴스타파는 권 원내대표에게 “국민의힘이 ‘국민께 죄송하다, 끝까지 책임을 다하겠다’고 했는데 무엇이 죄송한 것이냐”고 질문했다. 국민의힘은 윤 전 대통령 탄핵 결정 당일 전국에 이 문구를 쓴 현수막을 걸었다.


국민의힘은 겉으로는 일단 탄핵에 승복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권영세 전 비대위원장은 “민주당의 의회 폭주와 정치적 폭거를 막아내지 못한 점에 대해 반성한다”며 “국민께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발언했다. ‘죄송’한 것은 대통령 탄핵을 막지 못해서이고, ‘끝까지 책임을 다하겠다’는 것은 민주당을 저지하겠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이다.


서 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이 비상계엄 사태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는지는 우리가 그냥 짐작하고 말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입으로 직접 말하게 해야 그 순간 모든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사실이 된다”며 “정치인의 사상과 인식은 다음 선거 때 그를 뽑아야 할지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공적 정보”라고 말했다.


서 대표는 그러면서 “정당은 상대를 설득하고 소통하면서 의사 형성의 기능을 해야 하는데 지금 국민의힘은 시민이 공적 정보를 얻는 기회를 막고 하고 싶은 말만 하겠다는 것”이라고 짚었다. 또 “언론의 견제가 무력화하면 정치가 파렴치해진다”고 경고했다. 언론이 불편하지 않으면 얼굴을 붉히지 않고도 상식 밖의 궤변과 행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기자 폭행, 국회 침탈 같은 민주주의 부정

서 대표는 권 원내대표의 폭력이 포퓰리즘보다 심각한 무언가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표퓰리즘이 파괴적인 열정을 동원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폭력을 동반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했다. 기자에 대한 공격은 군을 동원해 국회를 침탈한 것처럼 민주주의가 허락한 범위를 벗어나는 행위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기자에 대한 폭력이 언론이 더는 필요 없다는 식의 역할 부정으로 봐야 한다고 진단한다. 언론의 질적 수준과 상관없는 공격은 시비를 피하려는 언론이 결국 역할을 스스로 포기하게 할 위험이 크다. 올해 기자 생활을 시작한 이들은 언론의 가치 부정과 공격부터 경험한 첫 세대가 됐다.


서부지법 폭동 중 취재진을 폭행한 박모씨는 9일 검찰이 징역 2년을 구형하자 “기자님의 취재 의무가 있는데 군중심리로 나섰다. 죄송하다”며 빌었다. 마찬가지로 기자를 폭행한 우모씨에게 법원은 16일 징역 10월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특정 언론사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정만으로 증오와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언론의 자유는 크게 위축되고 우리 사회 민주주의 역시 크게 후퇴할 수밖에 없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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