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간 비상계엄 같은 일 겪은 '시사기획 창' 기자들

[KBS 시사제작국 기자들 "자율성 침해"]
방송 전부터 언론단체에 내용 유출
방송 연기된 것, 외부 통해 알게 돼
항의한 팀장 발령내고 새 인물 앉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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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시사기획 창’(창)을 만드는 시사제작국 기자들은 올해 들어 처음 겪는 일을 자주 마주하고 있다. 기자들이 발제해 공들여 취재·제작하고, 팀장·부장까지 데스킹을 끝낸 한 편의 프로그램 원고가 국장, 본부장으로부터 “나노 단위로 인수분해 되며” 수정 지시가 내려오고, 프로그램이 방송되기도 전 내용이 극우언론 단체로 유출되고, 방송이 연기된 사실마저 이 단체의 성명으로 기자들이 알게 됐던 일. 방영 전 편성 정보 유출이라는 심각한 상황임에도 기자들의 유출자 조사 요구는 계속해서 거부되고, 오히려 이에 항의한 팀장이 교체된 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 시사기획 창 기자들은 “명백한 제작자율성 침해 사태”라며 “이런 사태를 우리 스스로 지켜내지 못해 부끄러울 뿐”이라고 토로했다.

지난해 12월 취임한 박장범 사장이 이재환 보도시사본부장(옛 보도본부장), 김철우 시사제작국장을 임명하고 난 후 일어난 일들이다. 먼저 올해 1월 ‘대통령과 우두머리 혐의’ 편을 제작한 기자 3명의 성명을 통해 폭로가 나왔다. 해당 프로그램은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한 달을 맞아 12·3 비상계엄 사태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살펴보는 내용이었다. 기자들은 방영 직전까지 이재환 본부장, 김철우 국장으로부터 ‘이 상태로는 방송이 힘들다’는 말을 후렴구처럼 들으며 제목 끝 ‘혐의’ 추가, 박장범 사장이 대통령과의 대담에서 했던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 조그마한 백’ 질문과 윤석열 전 대통령 답변, 해당 대담의 여파를 데이터로 분석한 내용 등을 아예 삭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전했다.


‘일단 불방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자들은 피 말리는 과정 끝에 대통령과 우두머리 혐의 편을 내보낼 수 있었다. 방영 이후 기자들은 당시 성명에서 “방송이 나갔으니 그냥 덮고 지나가면 되는 일이냐”며 “왜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서 꼭 필요한 논리 전개의 한 부분을 논리적 설명도, 정당한 절차도 지키지 않으면서 빼야 한다고만 강요한 것이냐”고 일갈했다.


창 기자들에게 국장, 본부장의 이 같은 수정 지시는 이례적인 일이다. 시사제작국 소속 A 기자는 “일종의 인질극을 벌인 거다. 부장까지 통과한 원고에 대해 국장과 본부장이 어떤 문장 자체에 대해 건건이 수정을 요구한 사례는 근래 들어 거의 없었던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데스킹을 한다 해도 주제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을 조언한다든지, 반향을 일으킬만한 타이밍을 고려해 방송 일정을 조율하는 식이라면 문제될 게 있었겠나. 완전히 네거티브한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라며 “사장과 관련이 돼 있거나 윤 전 대통령 탄핵, 계엄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에 대해 집중적으로, 의도적으로 데스킹이 들어온 건데 제작 자율성 침해 범주에 속한다고 본다”고 했다.


창 기자들은 ‘항명과 복종’ 편 방송 내용이 외부에 유출되는 상황마저 겪어야 했다. 대한민국언론인총연합회(언총)는 4월1일 제목과 내용이 외부에 공개된 적 없는 해당 편에 대해 “정치 편파 방송”이라고 언급한 성명을 내어 “4월8일 방송 예정이었지만 미뤄졌다”고도 했다. 방영 연기는 당시 제작진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실제로 해당 방송은 4월22일로 미뤄졌다.


항명과 복종 편이 방영되기까지 과정에서도 김철우 국장의 일방적인 편성 변경 통보, 제목 수정 지시가 있었다. 당초 창 제작진은 윤 전 대통령 탄핵 인용 시 ‘계엄군: 항명과 복종’ 편을 4월8일에 방송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4월3일 김 국장은 탄핵이 인용되더라도 다른 아이템을 방송하라고 지시했고 다음 날에도 언총 성명을 언급하며 “계엄군 아이템은 원고의 편향성이 고쳐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방송 연기를 통보했다고 전해진다. 또 김 국장은 해당 편 제목에서 ‘계엄군’을 반드시 빼야 한다고 했고, 아예 ‘군 다시 서는 조건’ ‘다시 헌법의 길’ 등 기획 의도와 동떨어진 제목으로 변경하기를 요구했다고 기자들은 전했다.


이후 12일 김철우 국장은 방송 일정 일방 통보에 항의하고 제작진과 함께 편성 정보 외부 유출 진상조사를 요구한 서재희 당시 창 팀장을 경질했다. 이에 다음 날 시사제작국 기자 21명, KBS 기자협회는 연달아 성명을 내어 “경질 대상은 편성 정보 유출자”라며 이번 인사 조치 중단을 요구했으나, 사측은 23일자로 조빛나 베를린 특파원을 신임 팀장으로 인사 발령했다. 서 팀장은 디지털뉴스2부로 인사 조치됐다.


김철우 국장은 14일 KBS 기자협회와 진행한 면담에서 이번 인사 조치에 대해 ‘본부장이 팀장 자리가 있는지 알아보라 했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앞선 보도위원회, 면담 등에서 김 국장은 프로그램 편성 정보 유출 건에 대해 ‘회사 내부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도 외부에 유출된다’며 편성 정보 유출도 같은 선상이라는 인식의 입장을 낸 것으로 알려진다.


편성 정보 사전 유출에 이어 방송 제작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방송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기자들의 주장도 나온다. 시사제작국 B 기자는 “아주 쉬운 언어로 ‘어떻게 언론인이라면 고개를 내저을 만한 과격한 주장을 하는 외부 단체와 내통할 수 있냐’는 거다. 이 단체의 글들을 보면 KBS 기자들의 제작 자율성을 공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방송법 상 어느 누구도 방송 제작의 어떤 자율성, 독립성을 침해하거나 침해하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KBS에선 박근혜 정부 때 청와대 홍보수석이 보도국장에게 통화 한 것으로 처벌을 받은 사례가 있어 내부적으로 더더욱 민감하다”고 말했다.


창 기자들은 이번 팀장 교체가 “더 심한 개입”이 목적일 수 있다고 위기감을 드러냈다. 15일 KBS 기자협회는 <부당 인사로 덮을 수 없다, 외부 유출 의혹 규명하라> 제하의 성명을 내어 “인사의 배경이 편성 정보의 외부 유출 의혹을 덮기 위한 시도”가 아닌지 의심하며 “창이 편향적이라 규정하며 번번이 제작자율성 침해 논란을 일으킨 책임자들이 프로그램을 입맛에 맞게 길들이기 위해 CP를 교체한 것이 아니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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