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 없는 정치

[언론 다시보기]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198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고등학교 2학년이던 나는 서울의 20여개 고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서울지역고등학생연합(서고련)’의 일원으로 명동성당에서 공정한 선거와 교육민주화를 요구하는 농성을 벌였었다. 서고련은 4·19 이후 결성된 최초의 고등학생 운동조직으로 평가받지만, 내게는 상처로 남았다. 광주학살로 정권을 잡고 6·29선언으로 국민을 기만한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성탄 무렵만 되면 늘 마음이 아프고, 세상에 대한 환멸로 몸서리치곤 했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으로 겨울이 아닌 봄철에 치러진 두 차례의 선거를 경험하면서 그것이 ‘계절’ 탓이 아닌 ‘정치’의 문제란 사실을 새삼 깨우치게 되었다.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은 87년 체제를 마무리 짓고, 97년 외환위기 이후 더욱 심화된 신자유주의적 불평등 체제에 종말을 고하며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는 그런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지 못했다. 민주화 이후 기성 보수정당들은 끊임없이 정치 혐오를 부추겨왔다.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의 리더십이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의 대통령 선거는 국민의 도구로서 비전과 정책을 수행할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의 선거로 모든 판을 뒤엎을 수 있는 제왕적 대통령, 마치 ‘구세주’를 선발하는 대회인 양 치러지고 있다. 대통령 한 사람이 임명할 수 있는 자리가 1만8000여개에 달한다고 하니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명운이 갈릴 사람들은 그에게 충성을 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결과가 12·3 내란 이후 현재의 대한민국이고 우리 정치의 자화상이다.


87년 체제란 무엇일까? 대통령 선거마다 반복되는 논란이 정책 토론의 실종이고 이른바 진보정당 사표론이다. 늘 문제로 비판받아 왔지만 전혀 개선되지 못하는 까닭은 굳건한 양당 체제 아래에선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적 정당성 없이 집권한 권위주의 독재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겨 국민을 분열시켜 왔을 뿐이다. 12·3 내란 이후 곳곳에서 열린 광장의 목소리에서 드러나듯 주권자의 정치적 욕망과 의지는 더욱 다양하게 분화되어 발전하고 있지만, 구태를 벗지 못한 수구 세력은 지역감정에 고착된 양당 체제를 이용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해 왔다. 지난 총선 당시 위성정당 사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왜곡된 정치 지형을 공고히 하는 구조화된 정치질서 앞에서 기성 보수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광장의 요구, 제3의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이를 현실 정치에 반영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외환위기 이후 양대 정당은 시장과 타협하고, 자본 앞에서 더욱 유순한 정당이 되어 시장 논리를 최고의 정강 정책으로 삼을 뿐이다.


18일 저녁 두 시간 동안 치러진 대선후보 토론회는 이 땅에 진보정당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확인시켜 주었다. 경제 분야 주제로 치러진 토론회에는 그간 언론에서 그 이름조차 듣기 어려웠던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가 참여했다. 지난 선거에서 법률상 기준인 3% 이상을 득표한 덕분에 참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진보정당 후보였다. 그는 토론회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를 딱 한 번 공격했는데, 차별금지법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차별 없는 나라가 경쟁력 있는 나라”라며 1997년 김대중, 2007년 노무현, 2013년 문재인 대통령도 의원 시절에 직접 발의했던 “차별금지법 제정에 동의하십니까?”라고 이재명 후보에게 물었다. 이재명 후보는 부자 몸조심하듯 “이런 문제로 새롭게 논쟁과 갈등이 심화되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추진하기 어렵다”라며 답을 회피했다. 그러자 권영국은 이재명에게 “영원히 못 할 것 같습니다”라며 뼈 있는 한 마디를 던졌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지난 28년간 유보된 희망이자 공약이었지만, 촛불시위 현장에서, 은박지 한장으로 추위를 견디며 응원봉을 흔들던 빛의 광장에서도 가장 뜨겁게 쏟아진 요구였다. 광장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정치가 더 이상 반복되어선 안 된다. 선거 때 누구를 찍을지는 자유지만, 어떤 한 표가 사표가 된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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