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교련복 차림의 소년 두 명, 그리고 그들 옆에 놓여 있는 빵 조각. 이재의 5·18 기념재단 연구위원은 14일 광주 전일빌딩245 중회의실에서 진행된 강연에서 기자들에게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줬다.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작전 직후 노먼 소프 당시 아시아 월스트리트저널 기자가 촬영한 문재학·안종필 열사의 모습이다. 2021년 최초로 공개된 사진 속 문재학 열사는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주인공인 ‘동호’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5·18 최초 기록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넘어넘어) 저자인 이재의 위원은 1980년 그날 광주 현장에 있었다. 그는 사진을 가리키며 “이 장면이 있었기 때문에 한강 작가가 소설에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며 “제가 2017년 ‘넘어넘어’ 개정판을 다시 낼 때 밤중 옛 전남도청 앞을 대여섯 차례 왔다. 마지막 장면 특히 5월27일을 역사에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 이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어떤 상황이 여기서 벌어졌을까 최대한 그 상황을 묘사해보려 노력했다”고 전했다.
5·18민주화운동 45주년을 맞은 올해는 광주 시민들에게 유난히 특별한 해다. 지난해 말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라는 낭보에 기뻐한 것도 잠시, 그해 12월3일 45년 만에 계엄령 선포를 경험했다. 이 위원은 이번 강연에서 “12·3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80년 광주, 5·18에 대한 기억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살렸다고 말하고 있다”며 “우리에게 집단 학습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5·18의 성과로 만들어진 87년 헌법을 통해 국회 권한이 강화되며 계엄 해제권이 부여됐다”며 “이번 12·3 계엄을 막을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강연은 5·18 45주년을 맞아 광주전남기자협회와 한국언론진흥재단 광주지사 주관으로 14일~15일 진행된 ‘5·18 역사기행’의 일환이었다. 전국에서 모인 한국기자협회 회원 30여명이 참석해 강의를 들으며 5·18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겼다.
이날 강연에서 이성각 KBS광주 기자는 5·18 취재 분투기를 전하며 “이재의 위원이 한번씩 도청을 둘러보시는 것처럼 저는 취재가 힘들거나 게을러진다 싶을 때 80년 5월27일 그날, 나라면 도청에 남을 수 있었을까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 잡는다”고 말했다. 옛 전남도청 별관 보존을 위한 보도에 힘썼던 그는 2013년 ‘5·18 왜곡 추적 시리즈’로 5·18 언론상을 수상했다. 이후 광주뿐만 아니라 전남 지역 전체의 5·18의 흔적을 정리한 ‘잊혀진 기억 5·18 전남항쟁보고서’(2015년)를 보도했고, 기록을 뒤져 5·18 왜곡 비밀 조직 511위원회에 당시 서주석 국방부 차관이 활동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던 그다. 올해는 12·3 비상계엄을 계기로 5·18 민주화운동의 현재적 의미를 살펴보는 연속기획을 보도했다.
이 기자는 “80년 5월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 때 총에 맞아 팔이 떨어져 나갔던 분이 지난해 12월3일 비상계엄이 선포되는 걸 보고 주저 없이 여의도 국회로 갔다고 하더라. 그 분은 본인은 그날 살지 않았냐며 죽은 자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국회로 가는 것이었다고 했다”며 기획 계기를 설명했다. 이어 그는 “모든 걸 걸고 평생을 사시는 분들이 있고, 또 그날의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벽돌 한 장씩 올린다는 마음으로 일하는 많은 기자들이 있다. 서로 힘을 보태며 열심히 살아보려 한다”고 했다.
15일 역사기행 참가자들은 국립5·18민주묘지, 망월동 옛 묘역을 찾아 민주 열사들의 넋을 기렸고, 전남대 등 5·18 사적지를 방문하기도 했다. 연수 일정을 마친 기자들 손엔 광주전남기협이 직접 마련한 한강 작가의 책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2권이 들려있었다.
류성호 광주전남기자협회장은 “한강 작가의 수상으로 경축 분위기였다가 느닷없는 계엄령 선포로 엄혹한 겨울을 보내고 난 뒤 봄을 맞이한 특별한 해”라며 “광주전남 기자들은 1보 전진하면 1보 후퇴가 반복된다며 5·18 왜곡이 계속되고 있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전국의 기자들이 어깨 걸고 각지에서 힘써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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