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말한다. “영남에 맛있는 요리가 있어?” 때론 이런 말도 덧붙인다. “거긴 한국에서 제일 먹을 게 없는 도시들이야.” 과연 그럴까? 호남에서 4년, 서울에서 18년, 나머지 시간을 영남에서 살고 있는 필자로선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뭔가 말하고 싶은 열망에 몸이 들썩거린다.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은 그런 이유에서 발원한 졸고다. [편집자 주]
“먹고살 만한 시대가 오면 음식 관련 TV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난다”는 이야기가 떠돈 게 20세기 후반, 혹은 21세기가 시작되던 즈음이다. 내가 20대 말과 30대 초반을 살던 시절.
실제로 그랬다. 공중파 방송이 앞다퉈 전국의 맛집은 물론, 세계 각국의 별나고 특별한 요리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이지 듣도 보도 못한 재료를 사용해 기이한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별미가 세상엔 많고도 많았다.
한데,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때 본 수백 가지 요리 중 기억에 또렷하게 남은 건 가격부터 사람을 깜짝 놀래키는 곰 발바닥으로 만든 요리나, 염장한 북해산 철갑상어알이 아닌 우리가 익숙하게, 자주 먹어왔던 평범한 음식을 소개한 프로그램이다.
대략 20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MBC였는지, KBS였는지 흐릿하다. 늦은 밤 TV 속에 등장한 70대 노파가 카메라를 마주 보고 한숨을 쉬며 이런 말을 했다. 두부를 만들기 위해 콩을 삶던 커다란 가마솥 앞에서였다.
“아이고, 내가 전생에 죄가 많아 이번 생에서 두부를 만든다 아입니까.”
무슨 말일까? 겨우 흔해빠진 두부 가게를 운영하면서 ‘전생(前生)’까지 언급할 이유가 있을까? 그땐 나도 어렸으니 생각이 단순했고, 세상사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이 단편적일 때다.
말 그대로 동네 반찬가게에서부터 마트 식품코너까지 지천에 널린 게 두부지만, ‘제대로 된 두부’를 만들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게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흐른 뒤였다.
일견 단순하게 보이는 ‘두부 만들기’는 시작부터가 쉽지 않다. 두부 맛을 좌우하는 콩의 선택이 첫 번째 과제. 공기 맑은 산간 지역에서 기른 해콩을 찾기 위해 경상북도와 강원도 산간 농가를 뒤지는 일은 피곤하고도 사람을 지치게 하는 작업. 그럼에도 ‘두부 맛집’ 주인장들은 마다하지 않는다.
자, 이제부터 또 여러 난제가 등장한다. 선택된 콩을 얼마나 오랫동안 물에 불릴 것인지, 불린 콩을 삶는 시간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간수(습기 찬 소금에서 녹아 흐르는 짠 물)로는 어떤 걸 선택할지, 부드러운 두부가 엉기고 응고될 때까지는 또 얼마를 기다려야 할지…. 이 과정을 제대로 거치려면 밤을 꼬박 새우는 게 일상사라고 한다.
이쯤 되니 앞서 말한 그 할머니가 ‘전생의 죄’를 이야기하며 짙은 회한을 털어놓은 것일 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잘 만든 두부 한 모는 세계에서도 이름이 높은 와규(和牛) 맛에 뒤지지 않는다. 콩의 단백질이 고가의 소고기 단백질을 압도하는 것. 그 맛의 비결을 투여된 시간과 지극한 정성 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서너 해 전. 경북 상주의 유명 관광지를 취재하러 갔다. 밥때가 돼 시외버스터미널 인근을 서성거렸고, 동네 사람이 추천해 준 고풍스런 옥호(屋號)의 식당 문을 열었다. 주방에서 비릿함을 누르는 잘 익은 콩의 구수한 냄새가 풍겨왔다.
식물성 단백질에서 건강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들기름에 구운 손두부는 영남은 물론 호남과 서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한 음식이 됐다.
그런데, 그 집은 두부를 ‘산초기름’에 굽는다고 했다. 두부와 산초라…. 생경한 조합이다. 음식에 관해 모험가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면 주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맛은 어땠냐고? ‘천하일미’라고 하면 호들갑을 떤다고 욕을 먹을 터. 하지만, 산초기름 두부구이의 감칠맛은 아마 최소 10년은 혀와 코가 기억할 것 같았다. 딸려 나온 된장찌개와 더불어. 된장 역시 재료가 되는 건 콩이다. 허니, 그날 점심은 ‘콩의 향연’ 또는, ‘콩의 심포니’라 칭해도 무방했다. 협연자는 산초기름.
그 식당은 창업주가 40년, 물려받은 딸이 20년, 그러니 같은 자리에서 60년째 운영 중이다. ‘전생에 죄가 많은’ 두 여자의 고생이 만들어낸 ‘두부’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 그저 진미(珍味)라는 흔하디흔한 표현만으로 모자랄 것 같다.
[필자 소개] 홍성식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영남 음식> 연재를 이어갈 홍성식은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중·고교 시절.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을 외우라는 교사의 권유를 거부하고, 김지하와 이성부의 시를 읽으며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드나들었다. 그 기질이 지금도 여전해 아직도 스스로를 ‘보편에 저항하는 인간’으로 착각하며 산다. 노동일보와 오마이뉴스를 거쳐 현재는 경북매일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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