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 홍준표 장관

[글로벌 리포트 | 인도네시아] 고찬유 한국일보 자카르타특파원

고찬유 한국일보 자카르타특파원.

▲고찬유 한국일보 자카르타특파원.

지난해 4월 인도네시아 대선 유세 현장 취재는 고역이었다. 체감온도 40도를 넘나드는 유세장을 쫓아다니느라 살점이 3㎏ 떨어져나갔다. 7㎞가 넘는 유세 구간을 챙기려고 오토바이 뒷좌석에 2시간 앉아 ‘모터사이클 르포’도 시도했다. 연설을 마친 조코 위도도(조코위) 대통령에게 몰려가는 군중에 떠밀려 밟히기도 했다. 땀에 젖고, 비에 젖었다.


선거 당일 동네 투표소는 신선했다. 얼굴이 훤히 보이는 골판지 칸막이로 만든 기표소, 후보자들 증명사진을 모두 넣은 A2 남짓 크기의 총선 투표용지, 기표용 대못, 투표 후 손가락에 묻히는 중복 투표 방지용 보라색 잉크는 낯설다 못해 아기자기했다. 투표 마감 뒤 선거관리요원들이 기표된 용지를 꺼내 번호를 합창한 뒤 현황 종이에 다섯 개 묶음으로 막대 표시하는 현장 즉석 개표는 ‘바를 정(正)’자를 칠판에 썼던 예전 초등학교 반장 선거처럼 정겨웠다.


대선 결과 발표 후 불복 시위는 공포였다. 자카르타 도심을 비롯한 각지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져 8명이 숨지고 900여명이 다쳤다. 첫 집회를 지켜본 뒤 불상사를 우려해 다시 현장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평소엔 순하지만 군중 심리에 올라타면 무섭게 돌변한다는 인도네시아 국민성을 실감했다. 그 기세에 편승해 헌법재판소에 불복 소송까지 제기한 야권 주자 프라보워 수비안토 그린드라당 총재의 처사는 국론 분열과 정치 후진국의 상징으로 여겨져 씁쓸했다.


정작 놀라운 일들은 뒤이어 벌어졌다. 대선에서 두 번이나 맞붙은 최대 정적 조코위 대통령과 프라보워 총재가 지난해 7월 지하철(MRT) 단독 회동을 하더니, 석 달 뒤 조코위 대통령은 프라보워를 국방 장관으로 전격 발탁했다. 갈등과 적대, 불복과 폭력으로 물든 정치 지형을 순식간에 화합과 협치의 장으로 뒤바꾼 한편의 정치 드라마였다.


현지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프라보워는 우리 식으로 따지면 적폐다. 32년 장기 집권한 군부 독재자 수하르토의 사위로 부를 쌓았고, 여전히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각종 인권 유린과 학살의 군부 책임자로 거론된다. 프라보워가 조정장관(부총리)을 원했다는 얘기와 조코위 대통령이 신(新)수도 건설 관련 이권을 프라보워 측에 줬다는 설 등 뒷거래 의혹도 분분했다. 실제 신수도 예정지를 직접 가 보니 프라보워 일가 소유 농장이 포함돼 있었다.


조코위 대통령은 지난해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프라보워 기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정치 안정과 평화 추구가 우리의 미래를 위해 저에겐 가장 중요하다. 하루라도 빨리 인도네시아가 정치적으로 안정되길 원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우리가 하나 돼 나아가면 인도네시아의 미래를 함께 볼 것이다.” 현지 매체엔 “전문성을 보고 뽑았다”고도 했다. 조코위 대통령은 자신을 찍은 55.5%뿐 아니라 프라보워에게 투표한 44.5%의 지지까지 끌어낸 셈이다.


프라보워 국방 장관은 거침없다. 프랑스 러시아 등에서 무기를 사겠다고 흘려 잠수함과 전투기 협력을 이어온 우리나라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조코위 대통령은 직접 프라보워 장관을 대동하고 우리나라가 기술을 전수한 잠수함이 있는 해군2함대를 시찰했다. 한국과의 협력이 건재함을 보여 주고, 프라보워 장관과도 여전히 잘 지낸다는 이중 포석이 담긴 행보다.


최근 여론 조사에서 프라보워 국방 장관은 34명 장관 중 가장 일 잘하는 장관, 가장 인기 있는 장관으로 뽑혔다. 올해 69세로 다음 대선은 어림없다는 당초 전망을 비웃듯 차기 대선 주자로 다시 부상하며 입지를 다지고 있다. 그가 야당 총재로 머물며 조코위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하고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다면 이루지 못했을 성취다.


인도네시아 정치는 뺄셈의 정치가 아니라 덧셈의 정치다. 상대를 죽여서 공멸하는 대신 적을 살려서 공생한다. 정쟁이 민생의 발목을 잡는 일도 드물다. 협의를 통한 합의라는 전통 ‘무샤와라 무파캇(Musyawarah Mufakat)’과 다양성 속에서 하나됨을 추구하는 국가 이념 ‘비네카 퉁갈 이카(Bhinneka Tunggal Ika)’가 현실 정치에서 작동한 결과다.


우리는 어떤가, ‘문재인 대통령, 홍준표 장관’이라는 제목이 필자조차 낯설다. 정치 후진국이 어디인지, 정치란 무엇인지 새삼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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