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의 언어를 전파하는 언론

[글로벌 리포트 | 미국] 이태영 텍사스대 저널리즘 박사과정

이태영 텍사스대 저널리즘 박사과정.

▲이태영 텍사스대 저널리즘 박사과정.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11일 지면(AA11면) 한 면을 할애해 지난 54년간 총기난사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 1196명의 이름을 열거했다. 1966년 8월 텍사스대 타워 총기난사 사건을 시작으로, 최근 텍사스주와 오하이오주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까지 4명 이상이 사망한 사건에서 희생된 이들만 포함됐다. 마틴 배런 편집국장은 “총기난사로 인한 끔찍한 인명 피해를 반성하고, 미국이 지금까지 무엇을 잃었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면의 취지를 밝혔다.


지난 8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가 공개한 8월19일자호 표지는 올해 들어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한 미국 도시 253곳의 이름들로 빽빽하게 채워졌다. 빈 공간은 오직 타임지의 제호와 중앙의 “ENOUGH(이제 그만)”란 단어가 들어간 자리 뿐이다. 표지를 디자인한 샌프란시스코의 예술가 존 마브로우디스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총기 폭력에 허우적대는 한 나라의 무시무시한 초상화”라고 표현했다.


최근 잇따른 총기난사 사건으로 미국사회가 큰 충격에 빠졌다. 지난달 28일 캘리포니아의 한 지역축제에서 총격으로 4명이 사망한 데 이어, 이틀 뒤에는 미시시피주에서 2명이 총에 맞아 숨졌다.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지난 3일 텍사스주 엘패소에서 총기 참사로 20여명이 숨졌고, 14시간 뒤엔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10명이 숨지는 총격사건이 일어났다.


자고 일어나면 총기 관련 사건·사고 소식이 들리는 미국이지만, 일주일 동안 4건의 참사가 연이어 발생한 만큼 미국인들의 불안과 충격은 여느 때보다 높다. 언론들이 이처럼 파격적인 편집과 디자인으로 총기난사의 심각성을 호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총격사건을 둘러싼 종래와 다른 수준의 불안감을 의식한 듯, 수정헌법 2조에 따라 총기보유의 권리를 옹호해온 트럼프 대통령조차도 규제의 필요성에 대해 제한적으로 동의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는 총기 참사를 부르는 것은 “총이 아니라 정신 질환과 증오”라며 총기 구매자의 신원조회를 강화하는 법안과 위험인물의 총기소지를 규제하는 ‘적기법(red flag laws)’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이 정신질환과 증오를 강조한 것은 보다 적극적인 총기규제와는 선긋기를 하려는 의도로 해석되지만, 최근 발생한 총격사건의 상당수가 증오범죄의 양상을 띠고 있는 것 만큼은 사실이다. 엘패소 총격범은 물론, 지난 4월 샌디에이고 유대교 회당에 총기를 난사한 범인 역시 범행 전 극우 백인우월주의 온라인 게시판 ‘에잇챈(8chan)’에 인종차별적 선언문을 올렸다. 지난달 캘리포니아 총격범도 소셜미디어에 유색인종을 비하하는 게시물을 올린 점으로 미뤄 증오범죄인 것으로 당국은 보고 있다. 타임지가 총격사건 도시의 이름으로 도배된 표지를 공개하면서 “우리는 내부로부터 침식당하고 있다. 왜 미국은 백인 국수주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지고 있는가”라며 총기참사를 증오범죄에 연결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엘패소 총격범이 선언문에서 쓴 반이민적 어휘들은 폭스뉴스 등 보수언론이 사용한 표현들과 흡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동체의 안녕을 해치는 증오범죄를 방지해야 하는 언론이 오히려 증오의 언어를 학습시킨 셈이다. 뿐만 아니라, 조안 도노반 하버드 케네디 스쿨 교수는 언론이 총격사건 등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극우세력의 메시지를 확대, 전파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경고했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언론의 영향력이 줄었다고는 하나, 기성 언론의 파급력은 여전하다. 포스트와 타임지가 꿋꿋이 지면을 통해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것도 그 파급효과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언론의 영향력은 혐오의 언어에 날개를 달아줄 수도 있다. ‘일베’의 변조 이미지나 용어가 버젓이 보도되는 사고가 끊이지 않는 대한민국의 언론이 고민해야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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