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베트남 FTA가 의미하는 것

[글로벌 리포트 | 베트남]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정민승 항국일보 호찌민특파원.

▲정민승 항국일보 호찌민특파원.

공산당 일당체제인 베트남은 정치 측면에서 중국과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다. 집단지도제를 채택하고, 국가 권력서열 1위인 당 대표(공산당 서기장)를 중심으로 대통령(주석·현재 당서기장이 겸직), 총리, 국회의장이 권력을 분점하고 있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3권이 분립됐다고 이야기하긴 어려워도, 최소한 입법과 행정은 구분돼 있다고 할 수 있는 이유다.


입법과 행정이 구분되는 모습은 국회에서 관찰된다. 일당체제에서 국회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국회에서 쩔쩔매는 장관 등 고위 공무원들을 보면 베트남 국회는 분명히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과 베트남의 정치를 구분 짓는 한 장면이기도 하다.


의원 입법 발의가 안 되는 등 제도적 한계가 있지만, 베트남 국회의원들의 대 행정부 감시와 견제 기능은 커지고 있다. 법안과 정책을 추진하는 의회와 정부 주요 직위자에 대해 국회의원들이 신임투표를 하는 것도 입법과 행정이 분리된 베트남 정치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이 때문에 정부가 올린 법안이 모두 순조롭게 국회를 통과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다. 총리가 이끄는 행정부는 국회에 법안을 제출할 때 영향평가 보고서도 첨부하는데, 이 보고서는 해당 법안이 발효될 경우 베트남 사회와 경제·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사전에 이뤄진 세밀한 연구와 검토 결과로 채워진다.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당 정치국의 결정에 따른 정부의 법안 발의라 할지라도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꼼꼼히 확인한다는 뜻이다.


이런 베트남 국회가 지난달 중순, 유럽연합-베트남 자유무역협정(EVFTA)과 관련된 결의문 하나를 채택했다. EU가 자신과의 FTA 체결 조건으로 제시한 ‘결사의 자유 보장’ 등 노동 관련 기준에 베트남 국회 차원에서 ‘보증’을 하겠다는 내용이다. 이에 EU 의회가 화답했고, 그 덕택으로 지난달 30일 하노이에서 양측간 EVFTA 서명식이 열렸다.


EU와의 FTA 체결로 베트남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양 측 의회의 비준으로 EVFTA가 발효되면 EU는 즉시 베트남 상품 70.3%에 대한 관세를 철폐하고 7년 내 99.7%에 대한 관세를 없애게 된다. 사실상 모든 상품이 해당된다. 베트남도 발표 즉시 EU 상품 64.5%에 대한 관세를 철폐하고 7년 안에 97.1%를 무관세로 수입하게 된다. 베트남 정부가 올해 말 또는 내년 초 EVFTA 비준동의안 처리를 목표로 하고 있는 만큼, 내년부터 베트남으로는 EU 자동차와 기계가, EU로는 베트남 농산품과 의류가 더 많이 움직일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EU에 419억 달러어치를 수출한 베트남은 그 규모가 2030년까지 44% 이상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는데, 든든한 성장 엔진 하나를 더 장착한 베트남은 EU 의회의 조속한 비준처리를 고대하고 있다.


EVFTA 체결은 베트남의 경제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베트남이 막판에 수용을 결정한 ‘결사의 자유 허용’ 즉, 복수노조 허용 문제를 들여다보면 그렇다. 각 기업 노조는 현재 공산당 산하 베트남노동총연맹(GVCL)이 장악하고 있다. 일당체제의 베트남에서는 노동 분야뿐만 아니라 각 직능, 예술인 등 모든 단체도 단일하다. 그런 나라에서 노조에 대해서는 예외를 두기로 했다는 것, 제2의 노조를 허용하겠다는 것은 베트남으로서는 모험에 가까운 결정을 한 것이다.


권력이 나누어져 상호 감시와 견제가 이뤄지고 있고 입법과 행정이 뚜렷하게 구분됐다지만, 공산당 일당체제인 베트남에서 나온 이 같은 결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장이라는 토끼를 잡기 위해 EU와의 FTA가 필요했고 그 때문에 EU의 요구를 수용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지만, 동시에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면 ‘복수 노조 허용’ 요구는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 있다. 노동 분야의 ‘복수’가 자리를 잡게 될 경우 사회 전반에 또 다른 복수를 안착시킬 수 있는 체력이 된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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