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서 뉴욕타임스 읽기

[글로벌 리포트 | 캐나다] 김희원 한국일보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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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원 한국일보 부장.

▲김희원 한국일보 부장.

캐나다에서 뉴욕타임스 구독을 시작했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계기가 있다. 브렛 캐버노 미국 연방 대법관이다. 대법관 지명 후 캐버노가 성폭행 시도 의혹에 휩싸이면서 그의 고교생활이 까발려지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두둔이 도마에 오르고 대법관 인준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흥미진진한 이슈를 따라가고 싶었는데 뉴욕타임스가 무료로 공개하는 기사 한도(월 4건)를 이미 넘겨버렸다. 요리 레시피와 크로스워드퍼즐을 제외한 모든 기사를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구독료는 4주에 20캐나다달러(약 1만7000원). 첫 1년간 대폭 할인해 주는(현재 8캐나다달러·약 6800원) 프로모션에 망설임 없이 카드를 긁었다. 사건은 기사를 만들고, 독자를 부른다.


곧바로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뉴욕타임스 캐나다 지국장이었다. 신규 구독자에게 똑같은 내용을 자동발송하는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읽었다. 3명의 캐나다 특파원을 거느린 그는 구독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에 이어, 뉴욕타임스가 캐나다 뉴스에 있어서는 현지 언론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며, 그래서 죄송하다며, 그러나 오랜 전통과 저력을 자랑하는 뉴욕타임스의 심층 탐사보도와 양질의 기사로 보답하겠다고 했다. 이런 언론의 역할을 유지하는 데에 나 같은 독자의 (유료) 구독은 너무나 중요하다고, 계속 성원 부탁한다고 했다. 나는 감동스럽고 부끄러워 눈물이 날 뻔했다.


뉴욕타임스는 전세계 모든 신문을 통틀어, 디지털 시대에 구독자를 늘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매체다. 실제로 온라인 유료 구독자의 급속한 증가에 힘입어 구독 매출이 광고 매출을 앞서 있다. 영어 기반인데다 세계 최강국의 신문이라는 유리함은, 국내 언론으로서는 애초에 접근 불가능한 출발지점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토록 잘난 매체가 저렇게 낮은 자세로 독자 한 명 한 명을 대하는 세심한 관리가 뉴욕타임스의 디지털 전환을 성공으로 이끌고 있었다.


독자 관리는 립서비스가 아니다. 캐나다 지국장의 이메일은 한없이 겸손하지만, 퀄리티 저널리즘을 향한 뚜렷한 목표의식과 독자의 지적 허영을 자극하는 마케팅 전략이 담겨있다. ‘캐나다 현지 뉴스만 볼 거면 캐나다 신문을 봐. 하지만 뉴욕타임스를 구독하면 정말 괜찮은 걸 읽을 수 있어’라는 거다. 그리고 ‘나는 쿨한 뉴욕타임스 독자’임을 자각할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한다. 취재 기자와 활동가 등이 패널로 나온 마리화나 합법화 세미나, 미-중 IT 갈등을 주제로 한 전화 컨퍼런스 등이 그런 예다.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고 지적인 참여를 즐기는 독자들을 위한 뉴스 후속 서비스다. 마리화나 세미나는 참가비를 20달러 받았음에도 200석 객석을 꽉 채웠다. 독자들은 ‘뉴욕타임스를 구독하니까 이런 기회도 있네’라고 느낄 만하고, 신문사 입장에선 추가 비용 없이 독자의 충성도를 유지하는 방법인 것이다.


뉴욕타임스라고 온라인 콘텐츠 유료화가 쉬웠던 건 아니다. 2005년 칼럼 위주로 유료화를 추진했다가 포기했었고 다시 유료화로 돌아섰다. 1등 매체라고 해서 디지털 뉴스 시장을 거저 먹지는 않았다. 뉴스의 퀄리티를 유지하면서 디지털 환경에 맞게 다양화했으며 트래픽보다 충성도 높은 독자를 겨냥한다는 뚜렷한 방향이 보인다. 이건 뉴욕타임스 이야기라고, 미국이니까 가능한 거라고, ‘우리나라에선 유료화는 안 된다’고 말할 이들이 있을 것이다. IT 강국을 추구하던 90년대부터 우리나라에서 무료 콘텐츠 문화가 뿌리내린 게 사실이고, 포털 환경에서 뉴스 유료화 정책이 답이 안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거꾸로 묻고 싶다. 좋은 뉴스를 유료로 팔지 않고 한국 언론이 살아남을 길은 무엇이냐고. 세계 최정상의 신문이 저렇게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저렇게 낮은 자세로 독자에게 다가서는데 국내 언론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주위의 젊은 세대들이 맘에 드는 콘텐츠에 대해 선뜻 돈을 지불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본다. 문제는 뉴스에 돈을 안 쓰려는 ‘문화’가 아니다. 돈을 주고 사서 읽을 만한 가치 있는 ‘뉴스’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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