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씨는 일본을 응원했다

[글로벌 리포트 | 베트남]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베트남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마음이 편안하다’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 동남아 다른 국가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매력이 있다고 한다. 미주, 유럽의 선진국에서 베트남으로 옮겨온 주재원들의 평가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생활·근무 환경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국민성, 사고방식에서 모종의 동질감을 확인하고 거기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국과 베트남이 껄끄러운 과거가 없는 것은 아니나, 지정학적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 독도문제나 동북공정 같은 분쟁 요소가 없는 것도 배경으로 꼽힌다. ‘사람 사는 모습이 30년 전의 우리를 보는 것 같다’는 말도 일종의 호감 표현으로 이해된다.


1975년 통일 전까지 사이공으로 불리던 남부 호찌민시를 여행하다 보면 이런 감정이 비단 우리 한국인만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광고판을 덮고 있는 한류 스타들, 거리 곳곳의 귀에 익은 음악들, 한국인을 따라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한 베트남 사람들을 보면 그렇다. 여기에 더해 한강의 서강대교와 똑같은 모양을 한 사이공강의 빈로이교, 광화문 광장을 닮은 응우옌 후에(Nguyen Hue) 거리에서는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엿볼 수 있다.


실제 응우옌 후에 거리는 지난 2015년 베트남전 종전 40주년을 맞아 광화문 광장을 벤치마킹해 조성됐다. 세종대왕상이 놓인 자리에 해당하는 곳엔 베트남의 독립, 통일 영웅인 호찌민 주석상이 있고, 그 앞으로는 각종 행사 무대를 설치할 수 있는 공간, 또 그 앞으로는 바닥 분수가 깔려 있다. 대형 행사가 있을 때마다 광장 양쪽 찻길이 폐쇄되는 것까지 닮았다. 오토바이나 차량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거닐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 중의 하나로, 아름다운 주변 건물과 풍광을 구경할 수 있는 필수 관광 코스다.


지난 1일, 이 응우옌 후에 거리에서는 흥미로운 장면 하나가 연출됐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베트남 최초의 아시안게임 메달 사냥에 나선 날이다. FIFA 랭킹 100위권의 베트남이 70위의 아랍에미리트(UAE)를 상대로 전후반 90분 동안 1대 1로 끌고 가다 승부차기에서 3대 4로 패했다. 응원 나온 시민들은 광장에서 싹 사라졌다가 그로부터 1시간 반 뒤 다시 대형 스크린이 놓인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한국과 일본의 결승전 경기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축구는 베트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다. 자국팀 경기가 아니어도 유명한 선수들의 현란한 경기를 즐긴다. 특히 아시안게임 기간 7대의 대형 전광판이 설치됐던 이 곳은 올 초 중국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대회 당시 베트남팀이 8강, 4강, 결승전 진출 등 경기 때마다 축구역사를 새로 쓰자 단체 관람, 응원의 성지로 자리잡았다.


특파원으로 현지 주재하고 있는 기자의 관심은 베트남 사람들이 과연 어느 팀의 경기에 환호할까 하는 것. 동남아 한류의 중심, 사돈의 나라, 한국 수출 상대국 3위, 신남방 정책의 교두보 등 꼽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수식어로 우리는 베트남을 표현하고 있지만, 좀처럼 속 마음 잘 드러내지 않는 그들의 속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더구나 한국의 상대는 일본이었다. 경기 내용보다는 경기에 반응하는 관중들의 표정에 시선은 집중됐다.


첫 환호는 한국 골에서 나왔다. 한국의 두 번째 골에서도 환호성이 터졌다. 아무리 그냥 축구가 좋아서 거기 있었다 하더라도, 남의 팀 득점에 환호한 것은 베트남 축구를 아시안게임 4강에 올려준 한국인 박항서 감독에 대한 고마움, 한국 기업들의 투자와 일자리 창출, 공적개발원조 최대 사업국 등으로 한국과의 우호적 관계가 무의식 중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대 0, 한국의 승리로 끝날 것 같은 상황에서 일본이 골을 터뜨리자 함성은 또 나왔다. 모든 경기가 그렇듯 역전의 순간이 가장 짜릿하다. 추격, 역공으로 볼 수 있는 일본의 골에 관중들이 더 큰 환호를 보낸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그 같은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그 함성은 한국이 골을 넣었을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컸고, 더 길었으며 사람들은 더 열광했다.


누가 누굴 더 좋아하는지 따지는 일은 유치한 일이다. 하지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와 나라 관계에서도 그럴까. 한 베트남 청년은 “한국은 좋아하지만, 일본은 존경한다”고 했다. 베트남에서 본 한일전은 한국이 축구에서는 이겼을지는 몰라도, 평소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스며드는 데에는, 그들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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