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제신공 (削除神功)

[글로벌 리포트 | 중국]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중국인들이 ‘왕신반(網新辦)’이란 약칭으로 부르는 기구가 있다. 국가기구(인터넷 정보 판공실)인 동시에 공산당 기구(인터넷 안전 및 정보화 영도소조 판공실)를 겸하는 ‘한 몸 두 얼굴’의 조직이다. 베이징 시청(西城)구에 있는 청사는 아무런 표지가 없어 밖에서 보기엔 무슨 기구인지 알기 어렵게 돼 있다. 인터넷을 통한 선전ㆍ공보와 함께 사이버 공간 검열도 왕신반의 빠뜨릴 수 없는 주요 임무다. 이 조직의 특기는 ‘삭제신공’이다.

 

중국 국가주석직의 3연임 금지조항을 삭제하는 헌법 개정안이 공개된 2월25일 이래 가장 바빠진 조직이 바로 이 왕신반이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집권연장, 이론적으로는 종신집권까지 가능케 하는 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인터넷 상의 게시물들을 모두 걸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전제(傳制)’나 ‘독재(獨裁)’ ‘종신제(終身制)’등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단어들이 인터넷에서 사라졌다. ‘동의하지 않는다(不同意)’나 ‘나는 반대한다(我反對)’는 문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네티즌들은 동음이의어나 은유적 표현 등으로 검열망을 피하며 개헌 비판 댓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인터넷 공간을 무대로 하는 네티즌과 왕신반의 숨바꼭질이 펼쳐진 것이다.

 

 필자는 한국 국내의 방송작가로부터 “중국에서 ‘탑승’이란 단어가 금칙어가 됐다는 게 사실이냐”는 문의를 받았다. 필자는 금시초문이었지만 국내 일부 매체에는 그렇게 보도되고 있었다. 잠깐 생각해보니 의문이 풀렸다. 중국에선 비행기를 탈 때 탑승이란 단어 대신 ‘등기(登機)’란 표현을 쓴다. 비행기에 오른다는 뜻이다. 이걸 중국어로 읽으면 ‘덩지(dengji)’가 된다. 황제등극의 등극(登極) 역시 발음이 ‘덩지’로 끝부분 성조만 다르다. 등극과 동의어인 등기(等基)역시 발음이 같다. 네티즌들이 이 점을 이용해 ‘시진핑 주석이 비행기를 타는 것에 반대한다’는 식의 문장을 올려 검열을 피해가다 얼마 못가 검열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탑승’이 금지어 리스트에 올랐다는 내용의 국내 보도는 이런 사실을 전한 영문 외신기사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로 추정된다. 아무튼 중국 네티즌들은 이런 식으로 시진핑 주석의 집권연장 개헌을 황제 등극에 비유했다. 황제는 임기가 없기 때문이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황제 만세’란 표현도 인터넷에서 삭제됐다.

 

 중국인들이 흔히 ‘난세의 영웅’이라 부르는 위안스카이(袁世凱ㆍ1859∼1916)도 사후 100여년 만에 인터넷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봉변을 당했다. 위안스카이는 1910년 신해혁명으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제가 실시된 이후 총통으로 추대됐던 군벌이다. 그는 자신의 힘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공화제를 폐기하고 자신이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지만 결국은 3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퇴위하고 말았다. 개헌안 공개 직후, 시진핑 주석을 위안스카이에 비유하는 댓글이 인터넷에 퍼졌다. 위안스카이가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 화면에 ‘중화민족의 수치’라는 자막을 써 넣은 게시물도 나돌았으나 끝내는 삭제되고 말았다.

 

 교과서에 등장해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마소의 마음(司馬昭之心)’도 인터넷에서 종적을 감춘 금칙어다. 이 고사성어는 권력을 빼앗으려는 야심이 빤히 드러나 보인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밖에도 많은 단어들이 새로이 왕신반의 금칙어 리스트에 올랐다. 개헌안 공개를 전후로 해외 이민을 검색하는 네티즌이 급증하자 ‘이민’이라는 단어까지 검색 금지어로 지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런 인터넷상의 여론은 3월11일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의 표결로 개헌안이 통과됨에 따라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날 개헌안에 대한 찬반을 투표로 결정하는 인민대회당 회의장엔 28개의 투표함이 배치됐다. 하지만 투표장이라면 꼭 있어야 할 기표소가 없었다. 인민대표들은 자기 자리에 앉아 뭘 찍는지 옆 사람에게 훤히 보이는 가운데 기표를 한 뒤 걸어 나와 투함(投函)했다. 투표용지를 접는 것도 금지됐다. 무기명투표임엔 틀림없지만 비밀투표라고 말하긴 어려운 표결 방식이었다. 결과는 찬성 2958, 반대 2, 기권 3, 무효 1표. ‘중국특색의 표결’은 그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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