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오(好)의 의미

[글로벌 리포트 | 중국]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연전에 베이징을 다녀간 모 국회의원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그 의원은 중국의 고위층을 만난 자리에서 동해 표기 문제를 제기했고 상대방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구체적으로 뭐라고 답했냐고 묻자 고위층이 “하오(好), 하오”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말끝에 “좋은 기사 거리 아니냐”는 홍보성 멘트를 덧붙인 게 기억이 난다. 정치인의 말은 절반을 깎고 다시 더 반을 에누리해서 들어야 한다는, 수습기자 시절의 가르침이 그날따라 떠올랐기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망신스런 오보를 날렸을지 모를 일이다.


분명 ‘하오’는 ‘좋다’는 뜻이다. 하지만 때와 장소와 상황을 가려서 새겨야 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중국은 동해 표기에 찬성하기 어려운 나라다. 황해, 즉 우리의 서해를 포함하는 영역을 중국 대륙의 동쪽 바다란 뜻으로 동해라 쓰기 때문이다. 국제적 명칭인 동중국해를 중국 스스로는 동해라 부른다. 그런 중국에게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다를 동해로 표기해 달라는 건, 자칫 “한반도도 중국의 일부란 말이냐”는 반론에 부딪힐 수 있는 얘기다. 그 고위층이 ‘하오’라고 한 게 동해 표기를 받아들이겠다는 얘기가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당신의 좋은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를 줄여 ‘하오’라 답한 것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논란의 한·중 정부 간 10·31 합의와 그 이후 돌아가는 모양새를 되새기다보니 불현듯 이 얘기가 떠올랐다. 같은 발표문을 놓고 한국과 중국의 해석이 이토록 다른 이유가 뭘까 따지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얘기다.


외교 협상의 결과물인 발표문은 오해의 여지가 없는 명확한 표현을 사용하면 뒤탈이 없다. 하지만 그건 합의가 순탄한 사안에만 해당하는 얘기다. 명확한 표현을 최대한 억제하고 일부러 모호한 표현을 찾아 쓰기도 한다. 뭔가 합의를 했다는 성과는 남겨야겠지만 완벽한 의견 일치에는 다다르지 못한 문제일수록 그러하다. 문구를 각자 편의대로 해석하되 상대방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그 합의는 중대한 상황변화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굴러가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상대방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전제다.


10·31 발표도 이와 비슷한 경우였다. 두 나라는 당장 해결의 기미가 없는 사드 문제에 발목이 잡혀 양국 관계를 이대로 두면 안된다는 점에선 의견이 일치했을 것이다. 그래서 교류 채널을 다시 가동하고 정상회담도 하기로 했다. 합의된 것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사드 문제는 애초부터 완벽한 의견 일치에 이를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래서 나온 게 “상대방의 입장에 주의했다”는 식의 모호한 표현이다. 발표문 자체엔 ‘봉인’의 ‘ㅂ’자도 없다. 발표 당일 청와대의 고위 당국자는 이로써 사드 문제가 ‘봉인’됐고 더 이상 중국이 사드를 거론하지 않을 것이며 보복 조치 해제도 시간문제라고 홍보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강경화 외교장관도 모두 “사드는 봉인된 것으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한 달 이상 지났다. 시간문제라던 보복 조치 해제는 속이 터질 정도로 더디다. 중국이 사드를 거론치 않을 것이라던 정부 기대는 깨졌다.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문재인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사드를 거론했고, 왕이(王毅) 외교부장은 강경화 외교장관과의 회담에서 사드 문제를 가장 중요한 의제로 삼았다. 중국은 명백하게 사드가 ‘봉인’됐다는 한국 정부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해 오고 있다. 그래서 10·31 발표가 한 달만에 효력이 반감된 것이다.


협상장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양측의 해석이 다른 것일까. 중국이 과연 말을 바꾼 걸까. 협상장에서 오간 말을 우리 측이 잘못 넘겨짚은 것일까. 아니면 ‘봉인’ 해석엔 무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렇게 밀어붙인 것일까.


‘동해 표기’를 설파했던 방중 정치인의 사례가 자꾸 생각이 난다. 과연 그는 ‘하오’란 말에 담긴 여러 가지 복합적 의미를 새겨듣지 못하고 ‘YES’란 의미로 곡해한 것일까. 아니면 그런 점을 다 알면서도 기자에게 과잉 홍보를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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