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 상실...’ 10월24일 발간된 경향신문 노보의 1면 헤드라인이다. 경향신문의 존재감이 약화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올해 한국기자협회와 시사IN 신뢰도 조사에서 경향신문은 신뢰도 지표가 큰 폭으로 하락한 것은 물론 열독률 지수가 계속 떨어지고, 의제 설정을 주도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이 겹치면서 구성원들 간 위기의식이 확산됐다. 10월23일 김민아 편집국장의 사퇴 역시 구성원들의 이런 기류와 무관치 않다.
경향신문 구성원들의 위기의식은 그러나 전체 신문기자들의 위기감과 궤를 같이 한다. 뉴스 플랫폼으로서 경쟁력을 급격히 상실해가고 있는 ‘종이신문’ 기자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다만 매체에 따라 위기감을 구성하는 토대와 진행 정도가 미세하게 다를 뿐이다. 지금 이 시점에 신문기자들이 구체적으로 느끼는 위기감은 어떤 종류일까.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지만 뚜렷한 대안이 없고, 설사 대안이 있다 하더라도 실행력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신문기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봤다.
# 경향신문 A기자
“경향신문을 다들 신경이나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 주변을 보면 경향신문의 존재감이 별로 없다. 색깔도 없고 우리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나도 모르겠다. 우리뿐만 아니라 요새 신문 기획기사 중에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한국일보까지 보는데 이슈를 선도했다고 할 만한 게 없다. 이제 어느 언론사든지 ‘이게 정말 우리 사회에 중요한 문제야’라고 던지면 바람이 이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다. 어떤 이슈를 꺼내서 특정 계층에 먹혀들면 그 이슈를 선점하고 강화해 이미지를 형성해갈 수밖에 없는 시대가 온 듯하다. 경향신문의 문제는 그런 이미지가 없다는 거다. 다른 신문보다 그런 면에서 더 위기다.
이제 사람들은 비판 기사에 만족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비판하는 건 너무 쉽다. 언제 어디서든 뉴스를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가 ‘이 문제가 잘못됐어’라고 하면 ‘그래서 이 문제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라고 말하는 것 같다. 더군다나 영화 ‘내부자들’처럼 신문사도 일종의 권력기관, 비판의 한 축으로 여긴다. 신문사가 아예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주체가 되든가 특정 계층이나 세대가 기사를 봤을 때 공명하는 느낌이 드는 기사를 쓰든가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한겨레는 잘 하고 있다고 본다. 경향신문은 아직 특정 계층이 원하는 기사를 쓰는 건 언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 한겨레 B기자
“그런 한겨레도 최근 신뢰도 하락을 크게 체험했다. 기본적인 신뢰도 하향 추세에 합리적이든 비합리적이든 일부 독자들의 실망감이 맞물려서다. 여기엔 거대한 쓰나미 같은 디지털 미디어의 환경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최근 한겨레 ‘디스커버’팀이 강원랜드 채용비리 이슈를 썼는데 독자들은 한겨레가 이 문제를 꾸준히 보도했다는 걸 모른다. 대부분 뉴스를 모바일로 보는 시대에 꼬리표 없는 기사, 얼굴 없는 기사로 소비하고 있어서다. 누가 썼는지, 어느 언론사에서 썼는지 관심도 없다. 포털이라는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다 융해되어 버린다.
지난해 ‘최찾사’팀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보기 드문 대특종을 했을 때도 독자들은 한겨레가 한 지 잘 모르더라. JTBC만 기억했다. 지난 4월 ‘최찾사’팀에서 「최순실 게이트」를 펴냈을 때인데 어느 후배가 그런 댓글을 봤다고 했다. ‘이걸 왜 한겨레가 자랑했다고 내냐. 한겨레가 쓸 책이 아니라 JTBC가 쓸 책이다.’
그렇다고 장기적인 신문의 하향 추세를 외부 요인으로만 돌리기에도 그렇다. 우리 역시 독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너무 서툴기 때문이다. 신문은 일방적이고 불친절하다. 신문을 만들어온 문법과 작법이 그래왔다. 아직도 1면과 종합면에 어떤 기사를 배치할지가 하루 고민의 핵심이다. 출입처 중심의 뉴스 생산방식 역시 문제다. 각 부처 기관에서 주기적으로 쏟아내는 보도자료에 맞춰 베껴 쓰거나 틀어 쓰는 게 신문기사의 주다. 독자에겐 차별성이 없는 기사다. 탐사보도팀이든 심층취재팀이든 여론 시장 안에서 차별화된 콘텐츠가 중요한데 너무 소홀히 취급받고 있다.”
# 국민일보 C기자
“차별화된 콘텐츠는 배부른 소리다. 물 먹은 기사를 일일이 알아봐야 하는 현실에선 말이다. 매체가 한두 개도 아닌 시대에 남이 쓴 뉴스 알아보려면 한도 끝도 없는데 우리는 남들 다 하는 뉴스 보도하지 않으면 정보력 없는 매체처럼 보일까봐 다른 기사를 매우 의식한다. 좀 더 과감하게 선택과 집중을 했으면 한다. 다른 신문이 1면에 썼다고 원래 4, 5면에 잡혀 있는 기사를 더 늘리고 그러면서 단독 기사를 지우는 식의 옛날식 사고방식은 제발 버렸으면 한다. 독자가 그걸 비교해서 보나. 그러니 매체의 차별화가 여전히 안 되는 것이다.
사실 국민일보는 최근 디지털 퍼스트 기조에서 한 발 물러났다. 전임 편집국장이 온라인을 강조하면서 방향성 없이 무조건 속보를 쏘게 만들어 기자들이 힘들어했는데 현 편집국장이 오면서 현장에 압력을 주지 않는다. 그런 부분에서 부담은 없지만 사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이대로만 가서는 안 된다는 걸. 끓는 물속의 개구리처럼 지금은 따뜻하다고 누워 있지만 이 물이 언젠가 끓어오를 텐데 당장 절박하지 않은 것 같다.
국민일보도 그렇고 한국일보, 세계일보 등 소위 중도지들은 차장급들이 많이 없다. 경향신문이나 중앙일보의 방식처럼 현장에서는 온라인으로 기사를 쓰고 안에 있는 데스크들이 신문에 구겨 넣는 방식도 시도해보면 좋을 것 같은데 인력이 부족해 불가능하다. 그렇다보니 그런 회사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온라인은 온라인뉴스팀이나 ‘왱’팀에 맡겨두고 신문이나 잘 만들자는 방향으로 선회했지만 방학숙제가 밀려 있는 기분이다.”
# 중앙일보 D기자
“반면 우리는 디지털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어도 뚜렷한 성과가 없어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재작년 12월 이석우 전 카카오 대표가 디지털총괄로 오면서 2년여 간 회사에서 강하게 디지털을 밀고 갔지만 눈에 드러나는 성과가 없다. 이석우 총괄이 사표 쓰고 나간 것도 약간의 체념이나 불만 때문일 것이다. 혁신적인 안이나 성과는 나타나지 않고 초조함이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그래서 요즘에는 윗선에서 디지털을 강하게 밀고 가진 않는다.
중앙일보가 디지털을 강조한 건 신문의 위기와 콘텐츠의 위기를 구분했기 때문이다. 신문 산업은 하향일지라도 콘텐츠의 힘은 여전하다고 봤고 양질의 콘텐츠는 먹힐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통찰력 있는(인사이트한) 기사에 방점을 뒀는데 그렇다고 기존에 하고 있던 지면 제작이나 속보 업무가 사라진 게 아니라 많이 갈팡질팡했다. 그런 순간에도 JTBC는 특종을 터뜨려 출입처에서 비교될 때도 있었다. 내부에서 공론화되지는 않았지만 아마 각자 듣고 다니는 것들이 있을 거다. 격세지감이다.
사실 통찰력 있는 기사는 하루아침에 기자 능력이 두 배가 되지 않는 한 하루에 한 개 꼴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 기사를 많이 생산하고 싶으면 인력을 더 투입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인력은 줄고 있다. 인력 조정이 필요한 것 같고 내부에서도 최근 소폭 인사 이후 기존의 부서 개념을 팀으로 쪼개 각 파트의 전문성과 경쟁력을 키우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것도 방법이지만 완벽한 대안은 아니다. 위에서 방향을 못 찾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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