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플랫의 메모를 본 순간 소름 돋았다"

[시선집중 이 사람] 5·18 새로운 진실 추적 김인정 광주MBC 기자

광주지역 기자들과 ‘5·18 민주화운동’은 떼려야 뗄 수 없다. 매년 5월이면 광주정신을 기리는 특집보도가 쏟아진다. 8년차 김인정 광주MBC 기자에게 37주년을 맞은 올해 5월은 특별하게 남았다.


그는 1980년 5월21일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명령자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를 연출했고, 취재과정에서 미국이 신군부의 유혈진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려 한 사실을 새롭게 밝혀냈다.


광주MBC 5·18 37주년 특집 다큐 <그의 이름은>은 김 기자의 기획안에서 출발했다. 취재기자 입장에선 실현가능성이 높지 않았던,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계획이었다.


▲지난 8월 <5·18 발포명령자 추적> 보도로 ‘5·18 언론상’을 수상한 광주MBC 취재팀. 강성우 영상취재기자(왼쪽부터), 김인정 기자, 시상자인 윤석년 광주대 교수, 김철원 기자.

“올 초 ‘광주 전일빌딩 총탄흔적은 헬기 사격에 의한 게 유력하다’는 국과수의 발표가 충격적이었어요. 전일빌딩은 늘 그 자리에 있었는데 이제야 알게 된 거예요. 언론인으로서 게을렀구나, 많이 반성했습니다. 37년 간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사실을 찾고 싶었어요. 5·18을 오랫동안 취재한 김철원 선배가 몇 년 전부터 미국 취재하자던 게 떠올라 기획안을 썼는데 덜컥 채택된 거죠.”


취재팀장을 맡은 김 기자는 1980년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집단발포를 누가 명령했는지, 미국이 5·18에 얼마나 개입했는지 추적하기로 했다. 김철원 기자, 강성우 영상취재기자, 최선영 PD, 김지연 작가 등이 합류해 팀을 꾸렸다. 5·18 당시 미국과 전두환 신군부의 통신기록 ‘체로키 파일’을 지난 1996년 폭로했던 팀 셔록 기자와도 협업했다.


“저 혼자라면 시작도 못했을 거예요. 모두 헌신적으로 뛰어주셨어요. 노영기 조선대 교수 등 전문가들의 도움도 컸습니다. 예순이 넘은 셔록은 저를 늘 언론인 동료로 대해줬습니다.”


꿈만 같던 기획을 현실로 옮기는 내내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이었다. 1980년 광주 상황을 보고받았을 법한 미국 고위 관료들의 연락처를 알아내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숱한 시도 끝에 인터뷰이들을 확정하고 지난 4월 말 미국 취재에 나섰다.


“인프라가 열악한 지역 언론사의 해외 추적취재. 정말 어렵더라고요. 3개월 동안 준비하고 10일간 미국 한 바퀴를 돌며 취재했는데, 37년 전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의 이야기는 끝내 듣지 못했어요. 그래도 ‘닉 플랫 메모’를 입수한 게 큰 성과였습니다.”


‘닉 플랫 메모’는 미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부차관보였던 니콜라스 플랫이 1980년 5월22일 국무장관, 국방부장관, CIA국장,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백악관 정책검토회의 발언 내용을 자필로 메모한 것이다. 회의록처럼 꼼꼼하게 정리된 메모에는 ‘신군부의 무력진압이 실패하면 미군을 파견해 시민 시위 진압, 전두환이 청와대에 입성하면 받아들여야 한다’ 등 처음 밝혀진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플랫이 메모를 꺼낸 순간 소름이 돋고 식은땀도 나더라고요. 기자생활하면서 다시는 이런 걸 못 만날 것 같았죠. 그를 설득해 10페이지 가량을 촬영해 왔어요. 원문을 복기하고 내용을 분석했습니다. 다큐와 별도로 기획보도를 했고 좌담회도 열어 메모의 가치를 논의했죠.”


학계에서 '닛 플랫 메모'는 한미관계와 한국 현대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5·18과 미국의 관계를 연구해온 이삼성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는 "결정적인 국면에서 열린 가장 중요한 회의의 내용을 내부자의 기록으로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문건"이라고 평했다. 그럼에도 이 보도는 광주MBC에서만 방송돼 전국적 이슈가 되지 못했다. 김 기자는 아쉬움이 크지만 앞으로도 밝혀야 할 의혹, 진실이 많다고 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뻔뻔하게도 잘못한 게 없다고 합니다. 37년이 지났지만 유족들은 바로 어제 일처럼 아파하는데 말이에요. 저도 광주 출신입니다. 미국으로 출국하는 날 어머니가 ‘그때 살아남았다고 평생 자책했는데 5·18을 취재하는 딸을 보며 미안함을 던다’고 하시더라고요. 살아남은 이의 자녀이자 기자로서 역사왜곡이 반복되지 않도록 진상을 밝힐 겁니다. 이번 파업에서 이겨야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겠죠.”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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