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 지도자 윤상원은 탁월하게 용감했다"

5·18 보도 외신기자 회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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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전 광주의 참상은 외신기자들의 보도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사태 발생 전은 물론 이후까지, 끈질기게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천착해 온 이들의 회고담을 전한다. (광주전남기자협회 제공) 


칠흑같던 시골길...집 데려가 준 은인 찾고파(노만 소프)

▲노만 소프(5·18 당시 아시아월스트리트 저널 기자)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기억은 많은 감정을 저에게 줍니다. 물론 죽음, 유혈사태, 잔혹성 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들 기억은 고통스럽고, 앞으로도 항상 그러하리라 생각됩니다.


제가 광주에 80년 5월 21일에 도착했을 때 저를 둘러싼 시민들은 발포와 죽음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인근 병원으로 데려갔고 병원 의사는 저를 환자중의 한 명, 총을 맞은 한 남학생을 보여주었습니다. 환자 3명이 죽었고 여자환자는 총검으로 찔린 부상을 입었다고 의사는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도왔습니다. 도시 바깥 쪽 도로를 따라 누군가 “철도 트랙을 따라 이 길로 가시오”라고 쓰인 표지판을 부착했습니다. 도로는 군인들이 통제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철도트랙에서 조금 떨어진 곳곳에 누군가가 항아리를 비치했고 거기엔 더운 5월 걸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물과 바가지가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황을 알기 위해 목포로 갔습니다. 저는 여전히 시골에 있었는데 해질녘이 돼 곧 어두워 질 상황이었습니다. 남학생 2명을 만났고 그들은 제게 “도로에 군대 캠프가 있다”고 했습니다. 들어가기엔 너무나 위험한 상황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남학생에게 제가 머물만한 장소가 있는지를 물었고 한 학생이 그의 집에 머무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남학생은 저를 집으로 데려갔고, 소년의 어머니는 식사와 잠잘 장소를 준비해줬습니다.


몇 년전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다시 만나려고 했지만 그들은 이미 이사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의사와 차를 태워주었던 두 남자를 만나고 싶지만 저는 그들의 이름도 알지 못합니다.


요즘, 광주는 다른 이들에게 또 다른 의미로 기억됩니다. 저는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학부의 여름학기에서 지난 1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쳐왔습니다. 매년 학생들과 버스를 타고 광주를 찾아 5.18국립묘지를 방문합니다.


어느 해인가 에티오피아에서 온 학생 대표가 기억납니다. 그는 한국외대에서 한국정부의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고 있었는데, 학생의 할아버지가 한국전쟁때 한국을 위해 싸웠다고 했습니다. 묘역 참배는 그에게 중요한 순간이었고 우리들 나머지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광주는 희생의 기억과 더불어 과거를 배우고 추억하는 장소가 됐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죽음 불사한 투쟁...전 세계를 감동시킨 사건(브래들리 마틴)

▲브래들리 마틴(5.18 당시 볼티모어 선 도쿄지국장)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나의 1980년5월과 1993년 보도는 항쟁의 지도자인 윤상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윤상원은 탁월하게 용감했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말하기를 그의 지지자들에게 말한 것처럼 ‘광주를 탈환하기 위해 군대와 최후의 투쟁 속에 죽을 준비가 돼 있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윤상원은 죽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윤상원은 5월 26일 처음이자 마지막 기자회견에 참석하여 우리를 포함한 외국기자들에게 ‘미국이 개입하라’는 그의 요청을 미국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William Gleysteen)에게 전달해 달라고 촉구했습니다. 그 요청은 당시 윤 열사와 같은 생각을 지닌 동료들에게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광주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미국을 비난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기자들이 윤상원의 요청을 들었을 때, 항쟁은 9일째였고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우리들 중 몇 명은 서울로 돌아갔고, 그의 발언을 인용한 기사를 올렸지만, 그 이야기는 ‘5월27일 이른 아침 군대가 들어가 광주를  탈환했다는 뉴스’에 묻혀 버렸습니다. 윤상원과 여러 동지들이 죽게 된 바로 그 일 말입니다.


그가 계획한 것처럼, 그와 그의 동료들은 마지막까지 굴하지 않았던 순교자였습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군부독재를 7년 후 패망시킬때까지 싸우도록 고무시켰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1987년 민주주의를 성취했을 때, 저는 그들의 투쟁에 경의를 느꼈습니다. 이제 오늘날 한국을 보며 저는 제 조국이 때로 불완전할지라도, 우방이자 동맹국으로 유지하는 데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참혹했던 시위대 학살 현장(도날드 커크)

▲도날드 커크(5.18 당시 시카고 트리뷴 기자)

1980년 5월 초, 어느 맑은 날, 덴마크 출신 기자, 폴 스베스트럽 닐슨은  학생들이 도시를 장악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게 서울에서 광주까지의 긴 여정에 함께 하자고 했다. 학생들은 경찰들에게 돌을 던지고, 반미 문구를 외치고 있었다. 이는 당시 미 외교관 및 군 인사들과 정권을 잡은 한국 장군들 사이에 형성된 친밀한 관계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었다.


그 날 일요일 폴과 나는 처음으로 광주를 찾아 시외에 위치한 여관에 머물렀고, 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열정적인 시위대와의 인터뷰를 위해 시골길을 통해 광주에 들어갔다. 현수막을 흔드는 시위대를 가득 태운 승합차들이 길을 따라 위태롭게 달리고 있었다. 당시는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기 전으로, 나는 텔렉스 또는  뉴스 통신사들을 통해 기사를 보냈다. 나는 로이터 통신 서울 지국에 전화를 걸어, 당시 책임자인 앨런 레딧에게 서울로 복귀하지 않고 기사를 송고하는 방법을 물었고, 그는 “내가 받아적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군인들이 시위대를 제압하기 전 마지막 날, 헬리콥터를 동원해 뿌린,  “소년과 소녀들”이 연장자들의 조언을 존중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하는 전단을 주운 기억이 있다. 마침내 나는 당시 처음부터 취재를 위해 광주에 머물고 있었던 월 스트리트 저널의 노먼 쇼프와 워싱턴 포스트의 빌 차프만 기자, 그리고 다른 기자들과 함께, 지금은 당시 저항의 본거지로 알려진, 도청 건물 1층에 당도했다. 나는 그 두 기자와 함께 서울에서 광주로 차를 함께 타고 왔었다.


시위대들은 심지어 당시 군 체제에 대한 미국의 지지에 반대하기 위한 집회에서도 예리한 선전 감각을 동원했다. 그들 중 한 명은 내 여권 내역을 복사해 “프레스 카드”를 만들어 주었고 나는 몇 해 동안 그것을 지갑에 지니고 다녔다. 항쟁 주동자 중 한 명은 유창한 영어로 기사들이 되풀이 하기 좋아하는 선동적 인용구를 연신 뱉어냈다.
 
군인들이 시위대들 사이로 뛰어들어 수십 명을 학살하고 부상을 입히고 있던 당시, 나는 서울로 돌아와 더욱 많은 기사들을 작성했다. 시위가 끝나고 광주를 찾았을 때, 나는 병원에 입원해 있던 일부 부상자들을 만나고 도청 건물을 방문했다. 건물은 거의 텅 비어있었지만, 정권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은 분명해 보였다.  밖에는 긴 관들이 놓여 있었다. 희생자의 유족들은 관 뚜껑을 들어올리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신을 찾아 다니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인터뷰 했던 시위대 중 일부를 결코 다시 만나지 못했다.


파병군의 시위대 탄압과 미국의 위선(팀 셔록)

▲팀 셔록(5.18 당시 저널 오브 커머스 기자)

1980년 5월 27일, 광주의 오랜 도청의 어둠 속, 그곳에서, 비무장지대에서 파견된 한국 군대에 의해 시위대의 마지막 목소리는 잠이 들었다. 군인들은 당시 한미합동사령부 사령관 존 위컴의 승인에 따라 파병됐다. 미 정부의 최고위급이 내린 결정은 한미관계에 영원한 오명을 남겼다. 미군이 민주화 운동 세력의 편에 섰을 것이라 믿었던 많은 광주 시민들에게 이는 결코 잊지 못할 깊은 배신행위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대부분의 국민들은 5.18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고 미국 역시 탄압에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하자 반미감정은 들불처럼 번졌다.


군사독재자 전두환은 1980년 5월 17일 밤 국가 전역에 선언한 계엄령 시행을 위해 “공수부대”라는 특수부대를 광주로 투입했다. 이틀 동안, 광주 거리에서 군사통치의 종식을 요구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공수부대가 겨눈 M16 소총과 총구에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광주학살은 알려진 것처럼 현재 매년 정부 공식 행사를 개최해 추모하고 있다. 5.18은 대한민국 군국주의 역사상 가장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됐다.


수천 명의 광주시민들이 1980년 5월, 민중항쟁 기간 동안 시청 광장에 결집했다. 사실상 도시 전체가 현재 많은 한국사람들이 1981년의 “파리 코뮌”과 비교하는 자치공동체 탄생과정에 참여했다. 여성들은 시민군에게 음식과 물을 나누어 주었다. 택시와 버스 운전기사들은 저항군을 도시 전역으로 실어 나르고 몇 차례 사냥감을 찾아다니는 군인들에게 맞설 무기로 그들의 운송수단을 사용했다. 간호사들과 의사들은 부상자들을 돌봤다. 노소를 막론하고 시민들은 지역 병원에 몰려들어 헌혈을 했다.


나는 광주민중항쟁 직후 광주에 있었다. 그리고 1980년대 초반, 나는 “프로그레시브”, “네이션” 및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를 통해 학생과 노동자 중심의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과 당시 미 군대의 역할에 대해 보도했다. 1985년 나는 다시 광주를 방문했다. 당시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수년 동안의 탐구가 시작되었다.


나는 1996년 “저널오브커머스”와 한국의 “시사저널”에 연재기사를 써 카터 행정부가 1980년 군사 쿠데타 계획에 얼마나 깊이 연루되어 있는지를 최초로 폭로했다. “정보자유 법 (the Freedom of Information Act)”에 따라 취득한 미 국무부와 펜타곤이 은닉한 방대한 미 분류 문서들을 참고해서 기사를 작성해 한국의 군사정권이 1980년 봄 나라를 흔들어 놓은 대규모 학생 및 노동자 시위대에 군사력을 사용하도록 카터 행정부가 본질적으로 허가했음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광주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현대역사의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념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분수령으로 기억되고 있다. 광주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역사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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