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보다 실리로 푼 양안의 교훈

[글로벌 리포트 | 중국] 박일근 한국일보 베이징특파원

▲박일근 한국일보 베이징특파원

“우리는 물보다 진한 피의 한 가족 형제다.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함께 실현하자.”
“우리는 모두 염황(炎黃)의 자손이다. 중화의 진흥을 위해 서로 돕고 협력하며 힘쓰자.”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馬英九) 대만 총통이 7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나눈 이야기다. 1949년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분단 이후 66년 만에 처음 열린 정상회담에서 양안은 한 핏줄임을 확인하고 한 민족임을 과시했다. 두 사람은 600여명의 취재진을 위해 밝은 얼굴로 무려 80초 동안 악수한 손을 놓지 않았다. 양안의 정상은 중국이 100만발도 넘는 포탄을 퍼부었던 푸젠(福建)성 샤먼(廈門)시 앞바다의 대만 섬인 진먼다오(金門島)에서 나는 명주, 진먼 고량주로 그 동안의 원한도 풀었다. 이번에 이뤄진 역사적 만남은 양안 통일의 이정표가 됐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듯 하다.


취임 일성으로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친 시 주석으로선 양안 정상회담이 반드시 성사시켜야만 하는 숙제였다. 그는 이날 “우리의 자손과 후대가 아름다운 미래를 향유할 수 있도록 양안은 마땅히 민족 전체의 이익을 가슴에 품고 시대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 총통도 “한 개인이나 한쪽의 이익이 아니라 후대 자손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며 “중화 문화에 깃들어 있는 지혜로 양안에 서로 이익이 되고 모두가 이기는 길을 찾고 지키자”고 화답했다.


물론 이번 양안 정상회담은 2개월 여 앞으로 다가 온 대만 대선(총통 선거)과 총선(입법위원 선거)을 겨냥한 신(新)국공합작의 성격이 강하다. 지난 8년 간 집권해 온 국민당과 마 총통이 지나치게 친중국 정책을 펴면서 대만에선 거부감이 큰 상태다. 이에 따라 내년 1월 대선에선 반중국 성향인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후보의 당선이 기정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더구나 국민당은 함께 치러지는 총선에서도 참패할 것이란 관측이 적잖다. 입법회(국회)에서 국민당이 다수당 지위를 잃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올 수도 있다. 존립 근거마저 위협받고 있는 국민당으로선 공산당을 향해 구조 요청의 신호를 보내야만 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런 절박한 국민당의 손을 시 주석이 흔쾌히 잡아줬다는 데 있다. 시 주석은 앞으로도 임기가 7년 이상 남아 있다. 그러나 마 총통은 이미 임기 말 권력 누수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시 주석이 역사적인 첫 양안 정상회담을 마 총통과 한 것은 대만의 야당과 대만 독립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사실 차이 후보가 당선이 될 경우 양안 관계의 경색을 피하기 힘들 것이란 점에서 중국으로서도 어떻게든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게 속내다. 물론 차이 후보가 당선되고 재선까지 성공하면 시 주석의 임기 동안 양안 정상회담이 사실상 어렵다는 정치적 계산도 감안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안의 모습을 지켜 보면 부럽기만 하다. 양안처럼 우리 한민족도 남북으로 갈라져 있지만 접근 방식은 너무도 다르다. 중화 민족은 서로의 실리를 위해서 원칙과 명분, 과거 원한 등도 다 버리고 손을 맞잡고 있다. 사실 양안 정상회담은 그 동안 ‘하나의 중국’이란 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에 성사가 안 됐다. 마치 국가 대 국가가 정상회담을 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안은 이러한 원칙도 한 쪽으로 미뤄둔 채 실리를 찾았다. 반면 우리의 남북 관계는 실리보단 원칙과 명분, 격을 따지면서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한 채 몇 년 동안 제자리만 돌고 있다.


남북 관계의 개선은 남북 모두에게 이익이다. 어쩌면 북한보다 남한 경제에 더 이로울 수도 있다. 한국 대표기업마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은 우리 경제의 마지막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사실 우린 이미 두 차례나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는 점에서 관계 개선 면에서는 중화 민족보다 앞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새 이마저도 중화 민족에게 추월 당할 판국이다. 기업에 이어 역사도 중화에 추월을 당하면 한민족의 미래는 어디에서 찾아야만 할까. 남북 지도자가 자손과 후세를 위해 민족의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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