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노사정위원회가 일반해고,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완화 등 쟁점 사항과 관련해 위와 같은 단서를 달고 노동시장 구조개편에 잠정 합의했다. 문구만 놓고 보면 정부가 일방적으로 쟁점사항을 추진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노동계 일각에서는 “역대 최악의 야합”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동안 노사정 합의가 없더라도 단독으로 노동시장 구조개편을 위한 입법과 가이드라인 제정을 밀어붙이겠다고 공언한 정부에게 사실상 법제화의 길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노동시장 구조개편의 후폭풍은 언론계라고 예외는 아니다. 종합일간지 한 노조위원장은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고 신문 산업이 급속도로 사양화하는 상황에서 이번 노사정 합의는 발등에 떨어진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라고 평했다. 합의안이 법제화된다면 임금·고용체계가 결코 선진적이지 않은 언론사에서 해당 조항들이 악용될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먼저 일반해고와 관련해 다양한 문제가 떠오를 수 있다. 우선 성과 평가에 있어 기자 업무의 특성상 계량화하기 어려운 정성평가가 이뤄질 수밖에 없는 탓에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의 여지가 크다. 때문에 경영진의 눈 밖에 난 기자는 쉽게 저성과자가 되거나 저성과자로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저성과자로 낙인찍혀 해고된 기자가 설사 소송을 통해 복직한다고 해도 이미 그런 환경을 경험한 기자들이 알아서 자기검열을 하는 경우도 일어날 수 있다. 평가가 국장급까지 이뤄진다면 편집권 독립이 침해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또 노조위원장에 대한 보복이 행해지면 장기적으로 아무도 노조 전임자가 되려 하지 않으며 결국 노조가 와해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이를 수 있다.
‘저성과를 이유로 한 해고’와 ‘노동자 동의 없는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은 언론계에 있어 남의 얘기가 아니다. 기자의 업무 형태, 근로환경, 사회적 위치 등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할 수도 있다.
언론사 노조위원장들은 합의안이 법제화될 경우 임금구조가 성과형으로 바뀌고 이에 따라 해고요건이 완화될 수 있는 구조가 생길 수 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A 노조위원장은 “전반적인 추가 경영진에게 기우는 분위기인 것 같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인데 기울기가 법제화되면 기자들의 권익이 쉽게 침해될 것”이라면서 “경영진에게 유리한 조항은 한 번 정해지면 바꾸기가 쉽지 않은데 사측과 협상을 하거나 단체협약을 만드는 노조 입장에서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특히 일반해고와 관련해 노조위원장들의 근심은 크다. 계량화할 수 없는 기자의 업무 특성 탓에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평가가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류지영 서울신문 노조위원장은 “저성과자를 만드는 것은 쉽다. 기사만 쓰던 기자를 사업단으로 보내면 바로 저성과자가 된다”며 “본인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1~2년 간 최하등급을 받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회사가 만약 이를 악용하려고 한다면 충분히 특정인을 골라 저성과자로 낙인찍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종합일간지 B 노조위원장도 “사주가 있는 언론사나 정치적 성향이 뚜렷한 언론사, 정부가 지분을 갖고 있는 언론사들은 정권이나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 반대편의 사람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다”며 “이는 평기자뿐만 아니라 국장급 기자나 논설위원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때문에 경영진에 잘 보이고 싶은 일부 구성원들로 인해 편집권 독립이나 공정보도의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고 말했다.
억울하게 해고당해 소송에서 이겼다고 하더라도 그 경험은 조직 문화에 전반적으로 퍼질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종합일간지 C 노조위원장은 “해고된 기자가 다툼을 벌이는 과정도 쉽지 않거니와 해고가 무효라고 판결이 나더라도 그 과정을 지켜본 다른 기자들은 그런 무겁고 힘든 일이 자신에게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라면서 “한두 명만 그렇게 해고해도 전체적으로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노조가 와해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됐다. 채수현 SBS 노조위원장은 “노조 전임자들이 복귀할 때 원래 있었던 부서 외에 다른 부서로 발령 내 저성과자로 만들 수 있다”며 “그런 일이 발생하면 누가 노조 전임자가 되고 싶어 하겠나. 노조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취업규칙 변경과 관련해서도 노조위원장들의 우려는 컸다.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근로자의 동의 없이 취업규칙을 변경할 수 있다는데, 어떤 식으로 기자의 권익을 침해할지 그 범위조차 명확히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B 노조위원장은 “호봉제를 연봉제로 바꾸는 등 임금과 관련된 부분을 회사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며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열악한 상황이기 때문에 경영자구책을 찾기보다 임금 삭감 등을 통해 경영상황을 해소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크게 보면 임금뿐만 아니라 편집국장 선출 조항이나 편성권 개입 조항 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채수현 노조위원장은 “회사가 일방적으로 바꿔버리면 끝나는 일이기 때문에 노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며 “법률이 취업규칙 변경을 인정하면 파업의 명분도 사라질 수 있다. 결국 노조는 임금협상이나 할 수 있고 기타 근로여건에 대해서는 할 얘기를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조위원장들은 일반해고나 취업규칙 변경 등이 법제화되면 이런 우려가 사실이 된다고 지적했다. 최성진 한겨레 노조위원장은 “일반해고가 쉽지 않고 노동권과 근로조건이 폭넓게 보장되는 한겨레같은 회사에서조차 이번 합의안에 따른 후폭풍이 있지 않을까 예의주시하는 상황”이라며 “앞으로 있을 임금피크제 논의, 인사 고과 제도 개선과 관련해 이번 노사정 타협이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장영석 언론노조 노무사는 “정부가 일반해고, 취업규칙 지침은 법과 판례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안심시키고 있지만 사법부가 해석을 느슨하게 한다면 이 같은 우려가 사실이 될 가능성이 크다”며 “이미 입법의 내용은 정해진 것 같다. 그 내용은 전체적으로 언론계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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