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머런 정부 압박에 1000명 해고하는 BBC

[글로벌 리포트 | 영국] 김지현 골드스미스 런던대 문화연구 박사과정

▲김지현 골드스미스 런던대 문화연구 박사과정

BBC에 피바람이 분다. 정부와 왕실 칙허장 갱신을 위한 협상을 벌이기 전에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토니 홀 BBC 사장이 지난 2일에 직원들에게 직접 알렸다. 현재까지 알려진 인력감원의 규모는 1000명 이상. BBC의 전체 직원수 1만8000명 중 5%에 달하는 직원이 직장을 잃게 생겼다. 홀 사장 스스로도 이번 발표는 직원들에게 “매우 힘든 메시지”로 들릴 것이라며 사내 동요를 예상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칼을 빼든 이유는 무엇일까? 


BBC를 둘러싼 모든 문제는 수신료와 관련된다고 해도 무방하다. 현재 TV를 시청하는 영국인들이 가구당 지불하는 수신료는 연간 145.50파운드. 한화로는 약 26만원에 이르는 거금이다. 이 수신료 징수를 통해서 BBC는 재정의 주요 기반을 마련한다. 


앞서 언급한 왕실 칙허장은 수신료를 포함해 BBC가 공영방송 서비스로서 갖는 특별한 위상을 결정하는 제도적 장치다. 10년마다 갱신되고 있다. 그런데 사실상 이름만 왕실 칙허장일뿐 그 갱신 과정에서 BBC와 관련된 의제들을 협의하는 주체는 영국 정부다. 협상을 앞둔 BBC가 정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직원들이 토사구팽이라 비난할 위험을 감수하고서까지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진행하려는 이유도 협상에 앞서 재무구조의 효율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다. 


홀 사장이 밝힌 이번 구조조정의 직접적 이유는 TV에서 온라인으로 시청 행태가 급변하면서 2016~17년까지 수신료를 통해 조달되는 재원에서 약 1억5000만 파운드의 손해가 예상되고 있다는 것이다. TV 시청 가구를 대상으로 거두고 있는 수신료의 징수액이 실질적으로 줄어드는만큼 그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 홀 사장은 이러한 ‘재정적 도전’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관리층의 축소와 부서 합병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인력비용을 5000만 파운드까지 절감할 수 있어서다. 


올 여름부터 직원들과의 협상을 거쳐 구체화될 홀 사장의 구조조정안은 서너가지로 압축된다. 부서당 관리직의 수를 7명 이하로 제한하는 것과 다양한 부서에 분포돼 있는 기술팀을 하나로 합병하는 것, 비영업분야에서 인력감원과 병행해 운영과정 전반을 표준화 하는 것 등이다. 홀 사장은 이러한 방법들을 통해 “더 단순하고, 더 마른 BBC”가 되는 것만이 현 시점에서는 옳은 선택이라고 직원들을 설득하고 있다. 


▲토니 홀 BBC 사장은 2일 BBC를 더 단순하고 더 마르게, 미래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조직과 구조로 변화시킬 방침이라고 밝혔다. (BBC 홈페이지 캡처)

현재의 왕실 칙허장 유효기간은 2016년까지로 되어 있어 향후 18개월 간 정부, 방송 관련 감독기구가 왕실 칙허장 갱신에 대한 검토 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현지 언론들의 전망에 따르면 보수당 정부는 수주일 내 왕실 칙허장 갱신에 관한 정부 측 입장을 담은 ‘그린 페이퍼(green paper)’를 공개할 예정이다. 


그런데 일간지 텔레그래프가 이 ‘그린 페이퍼’에 정부로부터 독립해 BBC를 관리·감독하고 있는 BBC 트러스트의 폐지안이 담겨 있다고 6월25일에 보도하면서 이미 한 차례 파문이 일었다. 영국 정부가 방송통신 규제기관인 오프콤(Ofcom)이 BBC 트러스트를 대체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익명의 인사 발언이 인용되면서 보수당 정부가 지난 총선 기간 동안 대내외적으로 예고해 온 ‘BBC와의 전쟁’이 본격화되었다는 관측도 나왔다. 


확실한 것은 보수당이 지난해부터 공공연하게 수신료 제도의 변화를 추진해왔다는 점이다. ‘수신료제의 비평가’라고 불릴 정도로 수신료 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존 위팅데일 보수당 의원이 주도해서 발표한 정부보고서 ‘BBC의 미래’는 향후 75세 이상 가구들에게서 수신료를 받지 않는 방안과 수신료 미납자를 기소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고 있다. BBC는 이러한 방안들이 수신료에 기반을 둔 재원구조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반발했지만, 그에 대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반응은 위팅데일 의원을 신임 문화부 장관으로 기용하는 것이었다. 


이런 무언의 압력에 직면한 BBC가 선택한 것은 정부와의 협상 이전에 대내외적으로 그 재원구조의 효율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1000명 감축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면서까지 말이다. 허리띠를 졸라매다 이제는 허리띠 무게마저 버겁다며 내팽개치려는 BBC 경영진의 선택은 과연 ‘옳은’ 것일까. 


홀 사장은 이러한 힘든 시기라도 수용자들에게 뛰어난 콘텐츠와 프로그램을 제공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직원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해고의 위험에 떨고 있는 직원들이 공영방송 서비스의 무거운 책임을 그만큼 통감할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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