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기 TV조선 앵커
2001년 8월 조선일보에 ‘취재’기자로 입사해 사회부에서 1년쯤 굴렀을 무렵, 2002년 한일 월드컵이 개막했다. 거리 응원을 나온 시민들의 코멘트를 따는 게 주 업무였다. 이름, 한자성함, 직업, 주소, 나이, 성별…. 틀릴 새라 취재수첩에 꼼꼼히 받아적었다.
그러던 어느날 오후, 가판을 보았다. 시커멓게 뽑힌 제목은 이랬다. ‘오늘밤, 한 사내는 운다.’ 호나우두와 베컴의 얼굴 사진이 좌우로 큼지막하게. 브라질과 잉글랜드의 8강전 예고 기사의 편집이었다.
축구 경기를 마치 그리스 신화 영웅담처럼 풀어낸, 너무나 인문학적인 제목에 나는 영혼이 사로잡혔다. 내가 수집하는 미아 3동, 4동 같은 팩트 이상의, 팩트를 초월한 세계를 엿본 것이다. 누가 편집했는지 수소문했다. “한정일 선배잖아.”(이 제목은 한 시사 잡지의 2002년 대선 기사에 표절됐다.)
아~ 베토벤 머리에 풍채 좋은 그 선배. 나는 ‘한정일 같은 일’을 하려고 편집부로 옮겼다. 그는 파괴자였고 창조자였다. 이를테면 ‘경찰, 불법 도청업자 5명 붙잡아’ 이런 뻔한 공식을 거부했다. ‘벽이 듣고 있다, TV가 보고 있다’ 이런 식이었다. 덮어놓고 짧은 제목이 정답이라 믿을 때, 그는 유괴 아동의 장례식 기사에 장문의 추도 시(詩)를 지면에 도배했다. 한 간부는 그를 이렇게 평했다. “한정일 편집은 상을 줘야 할지 벌을 줘야 할지 모르겠다”고. 클래식 마니아와 미식가의 섬세한 감성에, 아래를 보듬고 위와 싸우는 장수(將帥)였다. 그를 닮은 지면은 늘 호탕하고 장엄했다.
모차르트를 경외하던 살리에르는 지금 TV조선에서 뉴스를 전달한다. ‘한정일표 지면 감동’을 방송에 구현해 보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면서.
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