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적 언어 부추기는 언론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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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25일자 조선일보 지면에 ‘티라노의 무는 힘, 노처녀보다 세다’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후기 백악기 공룡인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무는 힘이 악어의 2배에 달한다는 과학 기사였다. 그런데 제목으로 뽑은 ‘노처녀’와 ‘무는 힘’의 상관관계에 대한 언급은 본문 어디에도 없었다. 결혼적령기를 넘긴 여성에게 먹잇감처럼 잘못 걸리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는 남자들의 사석 농담이 여과 없이 제목으로 붙은 것이다. 부적절했다. 


지난 5일 연합뉴스는 부산의 불법 주정차 실태를 고발하는 사진전 소식을 전하면서 ‘김여사가 따로 없네’라는 제목을 달았다. 불법 주정차 같은 도로 위 몰상식과 미숙함의 대명사로 ‘김여사’가 사용된 경우인데, 40점의 사진에 등장한 불법 주정차 차량이 여성 운전자의 책임이라는 언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집에 가서 솥뚜껑 운전이나 하라”는 식으로 도로 상에서 문제가 벌어지면 일단 여성을 탓하고 보는 고질적인 성차별 언어임에도 이 ‘김여사’라는 단어는 언론에서 단골 표현으로 이미 자리 잡았다.


위의 사례뿐만 아니다. 요즘 언론에서는 여성혐오적 표현과 기사들이 우려스러울 정도로 잇따르고 있다. 온라인에 넘쳐나는 ‘OO녀’와 여성 상품화 기사를 논외로 하더라도 문제가 심각하다. 이는 매체의 정치적 스펙트럼과도 무관하다. 진보를 표방하는 한겨레마저 지난 9일자 ‘붉은 여왕의 나라에서 우리 자식을 기다린다’ 기사에서 30살 남편의 관점으로 임신한 아내를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존재이자 드라마 판타지에 몰입하는 미성숙한 개인, 산후조리원의 등급을 따지며 치맛바람을 예고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언론은 현상을 전달한다. 흥미로운 지점은 언론이 의식적으로 전달하는 내용과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내용이 괴리할 때이다. 양성평등주의에 입각해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평균과 비교하며 남녀 임금차별과 기업 이사회의 공고한 유리천장, 맞벌이를 해도 여성에게만 쏠리는 가사·육아부담의 현실을 고발하면서도 정작 언론 자신의 성차별적 태도는 여과하는 데 종종 실패한다. 양성평등은 데이터나 구호가 아닌 생활방식의 근간이 되어야 함에도 아직 우리 언론은 그 지점에 미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성차별적인 한국의 사회문화 전반의 중력에서 언론 역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문제는 언론이 한 사회의 여론을 가름하는 강력한 어젠다 설정의 권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불황과 정치적 갈등조정의 기능이 약화된 한국 사회에서 아무리 혐오적 표현이 만연하더라도 언론이 그 여성혐오를 ‘해도 안전한 것’으로 재생산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이다. 언론은 혐오를 스스로 드러냄으로써 대중의 혐오에 면죄부를 줄 수 있다. 나치 치하 독일 언론의 유대인 혐오는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기능하는 언론은 스스로를 경계한다. 예로 앞서 나온 표현과 유사한 차별 언어를 미국 언론이 썼다고 가정해보자. ‘티라노의 무는 힘, 흑인보다 세다’ ‘무개념 운전, 흑인이 따로 없네’. 당장 아프리카계 인권단체들이 해당 언론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제소하겠다며 나섰을 것이다. 비판적 시민들도 해당 매체에 대한 절독이나 광고주에 대한 압박 운동을 벌였을 것이다.


언론의 성차별적 표현 문제는 기자들 스스로 양성평등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주의 깊게 스스로 익혀나가는 과정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 기사의 관점과 완성도를 살피는 데스크급 기자들 또한 양성평등 감수성을 갖추어 차별적 언어가 언론에 발디딜 틈이 없도록 경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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