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와 用美用中 외교

[스페셜리스트 | 외교·통일] 김동진 세계일보 정치부 차장

▲김동진 세계일보 정치부 차장

또 한명의 ‘거인’이 우리곁을 떠났다.
싱가포르 국부이자 아세안의 창립자 중 한명인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가 23일 새벽 9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리 전 총리의 죽음에 대해 세계 각국이 애도의 성명을 내놓고 있다. 최근 국제 문제를 놓고 사사건건 얼굴을 붉히고 있는 G2(주요 2개국)도 예외는 아니다.


재밌는 것은 이들 미·중 양국 수장의 애도사에 드러난 공통의 표현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2일(현지 시각) 백악관 성명을 통해 “나는 리콴유 전 총리의 타계 소식에 깊은 슬픔을 표한다”며 “현대 싱가포르의 아버지이자 아시아의 위대한 전략가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도 조전을 통해 “싱가포르 공화국의 창시자”, “국제사회의 존경을 받는 전략가이자 정치가”라고 리 전 총리를 회상했다.


두 지도자의 평가대로 리 전 총리는 뚜렷한 비전과 철학을 바탕으로 싱가포르와 아세안을 실용주의 외교노선으로 이끈 위대한 전략가였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 역학관계를 교묘하게 활용해 지역발전과 번영, 평화를 구축했다.


말래카 해협의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싱가포르는 1965년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말레이시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경쟁 관계를 활용한 덕분에 두 나라를 모두 싱가포르의 소비시장으로 삼으며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리 전 총리는 1967년 지역발전과 안보보장 등을 위해 아세안 창립을 주도했다. 설립 당시 회원국은 싱가포르와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타이 등 5개국이었으나 현재는10개국에 인구 6억4000만 명, 국내 총생산(GDP) 3조 달러로 성장했다. 


리 전총리는 아세안의 주도권을 유지하면서 국제 정세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해 최대의 이익을 얻어내는 이른바 ‘아세안 중심성(Centrality)’ 전략의 기초를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세안 회원국 각각은 문화와 이념, 체제가 다르고 국력도 보잘 것 없지만 공통의 이익과 관심을 바탕으로 협력함으로써 자신들보다 큰 나라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해왔다. ASEAN+한중일, 동아시아정상회의(EAS), ASEAN 지역안보포럼(ARF) 등이 열릴 때마다 미국과 한·중·일 3국, 러시아, 심지어 북한까지 아세안의 눈도장을 받으려고 혈안이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리 전 총리는 생전 친중이냐 친미냐는 양자택일식 외교와는 거리를 둬왔다. 그는 1960∼70년대 철저한 친미 반공노선을 걸으며 공산주의의 거센 물결로부터 동남아를 지켜낸 투사이다. 동시에 그는 죽기 전까지 중국을 총 33차례나 방문할 만큼 대중 관계에 공을 들인 인물이다. 1972년 중국과 미국의 국교 정상화 교섭 때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의 자문역을 맡았고 덩샤오핑(鄧小平)이 개혁·개방을 추진할 때는 적극적인 조언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미·중 패권 경쟁시대를 맞아 철저하게 실사구시 입장에서 멀리 보고 미리 준비하며 결단력 있게 행동했다. 특히 친미친중의 양자택일 프레임이 아니라 용미용중 프레임으로 헤쳐나가고자 했던 외교 분야의 거인이었다. 아세안이 2012년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 간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이 발생했을 때 미국을 끌어들여 중국을 적극 견제하면서도 동시에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 주도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나 이후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와 AIIB 참여 문제로 미·중 사이에서 깊은 딜레마에 빠진 한국 외교가 곱씹어 봐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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