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논설위원의 특종

[글로벌 리포트 | 미국] 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

▲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지난해 12월17일 대 쿠바관계 정상화 발표 내용은 그로부터 두 달여 전인 10월12일자 뉴욕타임스의 사설 ‘오바마는 대 쿠바 금수조치를 끝내야 한다’의 내용과 흡사하다. 오바마 발표문은 쿠바를 국제사회에서 고립시켜 변화시킨다는 미국의 오랜 정책이 실패했으며, 오히려 그런 정책이 쿠바 인민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는 논리에서부터 대사관 설치, 쿠바 이민자들의 본국 송금한도 증가, 미국 통신사업자들의 쿠바 내 사업 기회 확대, 이민·해상순찰 협력, 쿠바감옥에 수감된 미국 원조기관 직원 석방 등 구체적 협력 내용들까지 사설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사설의 필자는 지난해 9월 뉴욕타임스 논설위원에 합류한 30대 에르네스토 론도노이다. 직전까지 워싱턴포스트의 외교안보 담당기자였던 론도노는 뉴욕타임스의 논설위원 19명 중 외교 부문을 맡고 있다. 그는 이 사설을 시작으로 오바마의 발표가 있는 날까지 여덟 편의 쿠바 관련 사설을 썼다. 에볼라 퇴치를 위한 쿠바의 대규모 의료진 파견을 칭찬하는가 하면, 미국 내 젊은 쿠바난민들의 쿠바정책에 대한 인식변화, 미·쿠바 간 스파이 억류 상황, 정권붕괴 정책의 실패, 기로에 선 쿠바경제 등을 상세하게 짚었다. 오바마 발표가 있은 뒤에는 준비했다는 듯 쿠바의 동성애자 권리, 인터넷상의 표현의 자유, 정치적 반대자의 활동 공간 확대 등을 주제로 연일 사설을 쏟아냈다. 그는 마치 오바마가 이 시점에 역사적인 쿠바 관련 정책을 발표할 것을 예견이나 한 듯 글을 써왔다.


뉴욕타임스가 일종의 ‘여당지 프리미엄’을 누린 것일까. 실제로 음모론이 제기됐다. 오바마가 여론을 떠보고, 우호적 환경을 만들기 위해 오피니언리더들 사이에 영향력이 크고, 자신에게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뉴욕타임스에 정보를 흘린 것 아니냐는. 사설 게재 시점과 내용을 보면 그런 의혹을 제기할 법도 하다.


하지만 발표 전까지 철저히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국무부 관리들도 배제하고 캐나다 등 제3국에서 오바마의 측근인 벤 로즈 국가안보 부보좌관 등 백악관 인사 몇 명만 참여한 채 진행한 쿠바와의 비밀협상을 일개 신문사 논설위원에게 알려줬을까.


론도노도 이를 부인했다. 그는 1월7일 공영라디오방송 NPR에 나와 오바마 행정부가 카스트로와 비밀협상 중인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첫 사설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 그는 논설실 회의에서 최근 몇년간 쿠바정책을 제대로 다루지 않은데다, 마침 2015년 봄 파나마 미주정상회의에서 쿠바 정상 참석을 놓고 미국이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 쿠바정책이 얼마나 시대에 역행하고 있는지 의제화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문제가 다른 긴급한 외교 현안들 틈에서 얼마나 주목받을지 스스로도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설이 나간지 사흘 뒤인 10월14일 쿠바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에 ‘뉴욕타임스 사설에 대한 피델 동지의 생각’이라는 기고가 실린 것을 보고 놀랐다. 더욱 놀란 것은 카스트로가 ‘권위주의’, ‘경찰국가’ 등 쿠바 체제에 대한 미국식 성격규정과 쿠바 반체제 운동가의 죽음 등의 내용이 담긴 사설의 민감한 내용들을 문단째 인용했다는 사실이다. 언론이 통제된 쿠바사회에서 사실상 유일한 언론매체인 그란마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엄청난 사건이었다.


카스트로는 여전히 미국에 대한 불신에 차 있지만, 뉴욕타임스의 이 사설이 복잡한 국제환경과 기후변화, 핵 위기, 에볼라 등 지구적 위기 속에 자국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쿠바와 관계정상화가 불가피한 점을 인정한 합리적인 글이라고 평가했다. 카스트로는 이어 10월19일 ‘의무를 다할 때’라는 기고에서 에볼라 대응을 위해 미국과 협력하는 것은 세계평화를 위한 일이라고 썼다. 론도노는 이튿날 ‘에볼라 대응에서 쿠바의 인상적 역할’이라는 사설로 화답했다.


언론인 론도노의 글이 어느 정도 양국간 화해에 역할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어쩌면 론도노는 자신의 진정성과 무관하게 어떤 거대한 ‘음모’에 포섭된 언론인일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머리띠 싸매고 민족주의 감정을 부추기거나, 적대국에 대한 증오를 확대재생산해 국가간관계를 긴장과 갈등으로 몰아가는 데 이용되는 것보다는 훨씬 매력적인 언론의 역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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