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영 전 전남지사 "기자들은 왜 팩트대로 쓰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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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 전 전남지사가 지난 17일 전남 무안군 남악신도시 전남발전연구원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말하고 있다. 박 전 지사는 이날 세월호 참사에서부터 언론 문제, 해직기자, 정치까지 다양한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박준영 전 전남지사를 만난 곳은 전남 무안군 남악신도시 한 사무실이었다. 중앙일보 기자 출신인 그는 2004년 보궐선거에서 전남지사로 당선된 뒤 내리 3선을 했다. 지난 6월30일 10년간의 전남도정을 마무리하고 지금은 전남도청 소재지인 남악 신도시에 거처를 마련해 지내고 있다. 지난 17일 인터뷰에서 박 전 지사는 세월호 참사에서부터 언론 문제, 해직기자, 정치까지 다양한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퇴임 이후 어떻게 지내고 있나.

 

“책 읽고 건강관리 하면서 지낸다. 충전의 시간이다. 그러다 비가 많이 오면 농작물 걱정을 한다. 지난번 해남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놀라기도 했다. 도지사 때 버릇이 아직 가시지 않았나 보다.(웃음). 할 수 없더라.”

 

-지인들과 연구원을 만들 계획이라고 들었다.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평화를 주제로 하는 연구원을 만들까 한다. 운영이 목표가 아니고 각계에 기여했으면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나라에는 평화가 없다. 갈등만 양산되고 긴장만 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지역, 사회단체, 가정도 마찬가지다.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런 것들을 연구하려 한다.

 

-왜 평화인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가 민주국가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기자들이 은어로 사용했던 ‘DJ’, ‘YS’는 이름마저 제대로 부를 수 없었던 시대의 산물이다. 그때와 지금은 비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밀양 송전탑 사태, 한진중공업 문제에서 보듯 사회 곳곳에 갈등은 여전하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이뤘는데 이런 갈등은 평화롭게 해결이 안될까. 이런 의문을 갖고 있다.”

 

“박 대통령, 왜 유가족과 만나지 않나”

 

-세월호 참사 5개월이 지났다. 진상규명은 안되고, 세월호특별법도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

 

“모든 당사자가 한발 양보해야 한다. 역지사지라는 옛말도 있지 않나. 자기주장만 하면 절대 돌파구가 없다. 민주주의는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답을 찾아가는 시스템이다. 자기주장만 하고 양보가 없으면 사회는 불안하고 갈등은 지속된다. 계속 싸움만 하고 있으면 나라가 어디로 가겠는가. 빨리 세월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있는 사람들과 후세들에게 그런 아픔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 수 있다. 세월호 참사는 잊을 수도 없고 결코 잊어서도 안되지만 이 분위기에 젖어 있어서도 안 된다. 여야와 유가족들이 한발 양보하고 타협했으면 좋겠다.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세력의 태도 변화가 우선 아닌가.

 

“유족들의 주장은 첫째 진상규명, 둘째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장치를 만들자는 두 가지로 요약이 된다. 진상규명 작업은 거의 됐다고 본다. 상당 부분이 됐는데 몇 가지 체크할 것이 남았다. 핵심은 이런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법적, 제도적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유족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해야 한다. “언제든 다시 만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유가족의 애통한 심정을 안아주고 치유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언론은 세월호 참사 과정에서 부끄러운 보도행태를 보였다.

 

“언론이 세월호 구조활동에 관한 무정부상태를 만들었다. 사고 초기에 전문 잠수부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왔다.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그 사람들을 24시간 방송으로 내보냈다. 그 사람들이 방송을 타면서 ‘정부는 뭐하냐’, ‘왜 저 사람 안쓰냐’, ‘이렇게 하면 되는데 왜 안하느냐’ 등 난리가 아니었다. 다 자기가 전문가들이었다. 막상 현장에서 아무런 역할도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만 갔다. 골든타임 60시간 동안 무정부 상태가 됐다. 정부의 구조 능력은 한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구조를 책임지고 해야 하는 것은 정부다.”

박 전 지사는 사고 첫날부터 현장을 지켰고, 6월30일 퇴임하는 날까지 이틀에 한번 꼴로 현장을 찾았다.

 

▲박준영 전 전남지사

“언론, 구조 골든타임에 무정부상태 만들어”

 

-박 전 지사도 언론의 구설에 올랐다.

 

“‘황제라면’이다. 교육부 장관이 라면 먹었다고 비판 보도가 나와 내가 기자들과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당시 상황은 쑥 빼고 박 지사가 먼저 라면 먹자고 했다는 보도가 나오더라. 4월16일 진도 실내체육관 상황은 이랬다. 구조된 학생들이 하나 둘 체육관에 도착했다. 옷 갈아입히고 모포로 덮어주고 따뜻하게 먹으라고 라면도 끓여줬다. 밥 때가 지나서 라면이라도 하나씩 먹고 일을 하자고 했다. 그 시간이 오후 1시 아니면 2시쯤 됐을 것이다. 당시 우리는 세월호 승객들이 모두 구조된 줄 알고 있었다. 그날 오후 4시가 넘어서야 구조 실패가 확연해지지 않았나. 또 학부모들이 울부짖는 곳에서 라면을 먹었다고도 하던데, 유가족은 한 사람도 없었다. 기자들은 왜 정확하게 안쓰나. 매체가 많다보니 경쟁심리가 지배했다. 그런 경향은 종편이 등장하면서 더 심해졌다. 울부짖는 유족들에게 카메라 들이대고, 지금 심정이 어떤지 묻고, 오죽했으면 유가족들이 카메라를 부수려고 했겠나.”

 

-기자 출신이다. 어떻게 기자를 하게 됐나.

 

“내가 기자가 된 것은 아버지 영향이 컸다. 10살 때로 기억한다. 어느 날, 아버지가 신문을 보다가 펑펑 우시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신익희 선생께서 대선 유세차 이리로 오다가 열차 안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많이 배우지 못하신 분이 신문 기사 하나에 비분강개하고 때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신문의 힘을 알았다. 가난한 농부를 감동시킬 수 있는 신문의 공적인 역할에 주목했고, 그래서 기자가 됐다. 목표는 논설위원이었다. 기자 생활 20여년(해직생활 7년 포함)을 하면서 논설위원을 못한 게 아쉽다.(웃음)”

 

‘씨알의 소리’에 기고했다가 해직당할 뻔

 

-기자생활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경찰기자 시절이었다. ‘씨알의 소리’에서 글을 하나 써달라고 했다. ‘혼인 빙자 간음’이라는 글을 썼다. 경찰서 유치장에 혼인을 빙자한 간음으로 잡혀온 사람들이 더러 있었는데 그걸 정치 현실에 비유했다. ‘민주주의 하겠다고 국민들에게 표를 받은 사람들이 막상 정권을 잡으면 민주정치는 않고 독재를 한다. 혼인을 빙자한 간음과 뭐가 다르냐’는 내용이었다. 잡지가 나오고 얼마 후 경찰서에서 기사를 쓰고 있는데 회사에서 호출이 왔다. 부국장이 빨간줄이 죽죽 그어진 잡지를 펼쳐놓고 물었다.

“네가 이 글을 썼냐?”

“네….”

“정부에서 사표를 받으라고 한다.”

“….”

“글은 잘 썼는데, 외부 언론매체에 기고한 글이라 회사가 책임질 수 없다.”

“알겠습니다.”

며칠 후 다시 불러 ‘새내기기자가 혈기로 쓴 것이니 한번은 용서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없던 일이 됐다’며 주의를 줬다. 가까스로 해직을 모면했다.”

 

-두 번은 피할 수 없었나 보다. 80년 5·18 직후중앙일보에서 해직됐는데.

 

“5월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5월18일 광주항쟁이 일어났는데 한 줄도 보도할 수 없었다. 광주시민을 폭도로 매도하는 보도만 나갔다. 왜곡보도를 더 이상 할 수 없어 중앙일보 기자들은 5월20일부터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차장급 이상 간부들이 신문을 제작하는 바람에 당초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럴 바에는 제작에 참여해서 광주항쟁의 진상을 제대로 알리자고 했다. 그때 기사에 주어가 없는 문장들이 나왔다. ‘폭도’라는 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광주는 계엄군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됐다. 7월 중순쯤 회사에서 사표 제출을 강요했다. 미리 인쇄된 사직서 용지에 내 이름을 적어 넣으며 ‘이건 오래가지 못하는 역사다’라는 생각을 했다. 7월31일 회사는 나를 포함해 33명의 사표를 선별수리했다. 검열거부와 제작거부에 적극 참여했거나 광주취재를 다녀온 기자들이었다.”

 

▲박준영 전 전남지사

“언론인 해직 야만적…빨리 복직시켜야”

 

-서슬 퍼런 군부독재 시대도 아닌데 해직기자가 16명이나 있다. 특히 YTN 기자들은 6년째 해직상태다.

 

“기자들이 언론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기자들에게 펜과 마이크를 빼앗은 것은 비민주적이고, 야만적이다. 해직의 고통은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다. 나도 경험했지만 생활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게 만든다. 빨리 복직시켜야 한다. 해직자들도 복직의 희망을 잃지 말고 어디에 있든 언론인의 소명을 다한다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87년에 중앙일보로 복직한 이후 8년 정도 기자를 하다가 회사를 그만뒀다. 40대 후반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언론계를 떠난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사내 문제가 컸고, 어차피 그만둘 경우 학교로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대학에서 3과목을 강의하기로 했는데, 당선자 신분인 김대중 대통령께서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왔다. 내가 김대중 대통령을 알게 된 것은 1971년 대선 때다. 당시 복학생인 나는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전쟁을 하지 않고도 평화적으로 통일을 할 수 있다’는 3단계 통일론 공약을 접했다. 학교 담벼락에 쓰인 ‘무찌르자 공산당’ ‘북진통일’ ‘때려잡자 김일성’ 등 구호를 보고 성장한 나로서는 큰 충격이었다. 그런 충격을 주신 분의 뜻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면 나도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박준영 전 지사는 1998년 2월 국내언론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공보수석 겸 청와대 대변인, 국정홍보처장을 하며 국민의 정부 5년간 김대중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셨다.

 

-김대중 대통령과 개인적인 인연은 없었나?

 

“전혀 없었다. 정계은퇴 후 뉴욕에 왔던 김대중 대통령이 뉴욕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 자리, 특파원 마치고 부장하고 있을 때 남북문제 전담하는 부장들과 대화하자고 해서 뵌 것이 전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업적 중 특히 박 전 지사께서 가장 크게 생각하는 부분은.

 

“기초생활보장법과 IT산업 육성이다.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국가는 국민들에게 기본적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며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실천했다. 최저생계비 이하 저소득층의 기초생활 보장을 위해 4인 가족에 90여만원을 보장했다. 탈세 방지를 위해 신용카드를 보급하면서 늘어난 세수로 재원을 충당했다. 대한민국 사회보장제도의 기초가 그때 닦여졌다. 대통령께서는 ‘산업화에 뒤진 우리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려면 IT를 해야 한다’며 벤처 및 IT산업을 적극 지원, 육성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IT강국이 될 수 있었다.”

 

“야당 정치인들 눈앞 이익에만 몰두”

 

-새정치민주연합이 야당으로서 존재 의의조차 잃어가고 있다. 문제는 뭐라고 보나.

 

“새정치민주연합에는 정치의 목적이 뭔지 생각하지 않는 정치인이 너무 많다. 정치는 왜 하느냐.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정치연합에는 국가나 국민보다 당, 당보다 자신을 우선하는 정치 풍토가 팽배하다. 새정치연합의 정치인들은 언행을 할 때 국가, 당보다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 한다.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주판알을 튕긴다. 그런 언행이 국민에게 신뢰를 못주고 있다. 이런 상태로 가면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 대패한다. 정권 창출도 못한다. 새정치연합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

 

-확실한 리더가 없어 지리멸렬한 것은 아닌가.

 

“리더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보다 조금 앞서가는 리더가 있다면 무시한다. 다 똑같기를 원한다. 그래서 리더가 못나오는 것이다.”

 

박 전 지사는 인터뷰 도중 언론인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고 했다. 고맙다는 말도 여러 차례 했다. “언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언론이 오피니언레이트 돼 있다. 여론을 주도하는 데만 매몰돼 있다. 그러나 독자가 원하는 것은 팩트다. 언론은 팩트를 제공하고 독자에게 맡겨야 한다. 사실이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지난 17일 전남 무안군 남악 신도시에서 박준영 전 전남지사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본보 김성후 기자(오른쪽)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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