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주도 성장과 기본소득

[글로벌 리포트 | 미국] 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

   
 
  ▲ 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  
 
미국인들과 얘기하다보면 공화당은 앞으로 당분간 대선에서 승리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를 종종 듣게 된다. 다음 대선에 민주당 후보로 유력한 힐러리 클린턴의 대세론에 필적할 상대가 마땅치 않아서만은 아니다. 인구구성에서 히스패닉계 등 소수인종 비율이 높아지며 보건·교육·노동·이민 등 영역에서 진보적 의제를 선점한 민주당이 전국적 차원의 선거에서 유리하다는 것이다. 부자 정당, 기업이익 옹호 정당의 이미지를 가진 공화당의 위기감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이어지고 있다.

공화당의 대권주자들 중 한명으로 거론되는 폴 라이언 하원 예산위원장이 지난달 보수성향의 미국기업연구소(AEI)에서 내놓은 빈곤대책도 그 중 하나다. 그는 “식비, 주택비, 연료비는 계속 올라가지만 월급은 제자리다. 민주당원이건, 공화당원이건 이대로는 안된다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우리는 빈곤과 싸우기 위해 92개 연방 프로그램에 8000억달러를 쓰지만 빈곤율은 사상 최고에 달했다”며 몇가지 아이디어를 내놨다.

그 중 기회보조금(Opportunity Grant)은 기존 식품권, 주택수당, 육아수당 등 11개 연방 복지 프로그램을 통합해 같은 액수의 돈을 주정부에 맡겨 운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증세를 하지 않아도 되고, 복잡한 수급자격요건 조사를 거쳐야 하는 중앙정부 프로그램보다 좀더 현장 수요에 맞는 복지를 제공할 수 있어 효율적이라는 논리를 폈다.

이 제안은 미국 내 동면하고 있는 기본소득 논의에 활력을 줬다. 기본소득은 아무 조건없이 모든 사람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분배정책이다. 뉴욕대의 알마즈 젤렉 박사는 기자와 인터뷰에서 기회보조금은 일하는 사람이나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준다는 점에서 엄밀한 의미의 기본소득은 아니지만 복지수당을 받기 위해 여러 다른 프로그램에 지원해야 하는 빈곤층의 부담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의 경제담당 기자 맥스 에런프런드는 각 개인이 돈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결정권자라고 본다면 연방정부뿐만 아니라 주정부의 개입마저도 제거해 개인에게 직접 돈을 주는 것이 보수적 원칙에 더 부합하는 것 아닌가라고 했다.

이 제안으로 미국 주류정치권에서 기본소득 논의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변화다. 클린턴 행정부의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UC버클리 경제학과 교수는 “인상적”이라고 치켜세워줬다.

기본소득은 분배정책이라는 점에서 진보적 의제이지만 정부 개입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미국 보수주의자들에게도 거부감이 덜한 편이다. 미국은 이 제도를 알래스카주에서 실시하고 있고, 1960년대 후반 비록 좌절됐지만 닉슨 행정부가 연방차원의 정책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폴 새뮤얼슨 등 경제학자 1000여명이 1968년 서명한 ‘경제학자의 보장된 연간소득 선언’에서 보듯 학자들이 논의를 주도했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정책으로 되기 위해 넘어야할 벽은 ‘아무도 일을 하지 않을 것 아니냐’는 관념이다. 1960~70년대 뉴저지, 노스캐롤라이나, 워싱턴, 콜로라도 주에서 기본소득 보장으로 노동유인이 얼마나 감소하는지 실험이 이뤄졌다. 그 결과 기본소득 보장으로 평균 10% 정도의 노동시간 감소가 있었다. 미국 정부는 당시 10%의 노동인구가 일을 중단한 것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본소득 보장으로 인해 일을 전면 중단한 사람은 별로 없었고 노동시간을 줄였을 뿐이었다. 노동시간을 줄인 이유도 남자는 주로 해고에 대비한 교육훈련을 늘리기 위해서였고, 여자는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강남훈 한신대 교수는 “노동유인 감소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고 오히려 학교 출석 증가, 주택 소유 증가, 영양 개선 등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왔다”며 “요즘처럼 일자리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매우 좋은 결과”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정부 새 경제팀이 일각의 의제를 포착해 ‘소득주도 성장’이란 말을 쓰고 있다. 여전히 일자리복지, 성장담론에 머물러있는 감이 있지만 가계소득에 눈을 돌렸다는 점을 높이 산다. 구조적 요인으로 성장률이 낮고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기 어려운 지구적 현실을 인정하고 기본소득에도 눈길을 돌려 논의가 더 풍부해지길 기대한다. 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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