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공장 노동자로 살기 힘든 미국
[글로벌 리포트 | 미국] 이태규 한국일보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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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규 한국일보 워싱턴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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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금융위기 여파로 미국 자동차 빅3가 파산 위기로 몰리자 전미자동차노동조합(UAW)의 위기감은 더했다. 최대 기업 제너럴모터스(GM)가 부도나면 사측이 합법적으로 노동계약을 재고할 수 있어, 보수층은 파산을 원했다. 빅3 위기가 강성 노조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높던 때라 무리한 주장도 아니었다. 다행히 친노조 성향의 버락 오바마 정부가 구제금융을 선택, UAW는 GM과 함께 기사회생했다.
위기를 넘긴 UAW가 최근 다시 타격을 입었다. 지난달 14일 테네시주 채터누가의 폴크스바겐 공장 노동자들이 투표를 통해 UAW 가입을 부결시켰다. 독일계인 사측이 중립을 선언하며 사실상 노조가입을 권고한 결과인 점에서 더욱 충격이었다. 외국계 자동차 공장이 몰린 남부에 교두보를 마련, 앨러배마, 조지아, 미시시피 주로 노조설립을 확산시키겠다는 UAW의 계획은 무산됐다. UAW의 패배 뒤에는 지역 정치, 경제계의 거센 반대운동이 있었다. 공화당이 장악한 주정부, 주의회는 노조가 설립되면 채터누가 공장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그 타격이 주 전체로 파급돼 외국계 업체들이 철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UAW가 디트로이트에 이어 채터누가를 삼키려 한다는 광고판이 거리에 나붙었다.
UAW가 남부의 외국계 자동차공장 진출에 실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채터누가에서 1시간여 떨어진 스머나의 닛산공장에서 UAW는 1989년과 2001년 두 차례 노조 설립을 시도했으나 부결됐다. 두 번째 투표는 2대 1의 일방적 결과로 부결됐는데 당시 카를로스 곤 최고경영자는 영상메시지로 노조가 설립되면 다른 곳에 투자하겠다는 경고가 주효했다. UAW는 10년 뒤 세 번째 노조설립에 나섰지만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 공장에서 8년간 일한 마이크 스파크스 주하원의원은 “노조가 세워지면 닛산은 공장 말뚝을 뽑아 떠날 것”이라며 “다른 외국계 기업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공연한 엄포로 보일 수도 있으나, 현지 경제사정을 살펴보면 이런 논리가 현지 노동자들에게 먹힌 이유를 알 수 있다.
채터누가의 빈곤층은 전국 평균 15%보다 높은 27%에 달하고, 도시 빈곤가구의 3분의 2는 여성 가장이 이끈다. 이달 3일 방영된 영화전문채널 HBO의 채터누가 다큐멘터리는 이런 빈곤의 이유가 저임금에 있다고 했다. 현지 간호보조사로 일하는 두 자녀의 엄마 에리카 매커디는 최저임금보다 조금 많은 시간당 9달러를, 또 폴크스바겐에서 일하는 마이클 캔트렐은 시간당 19.50달러를 받고 있다. 폴크스바겐마저 채터누가를 버리면 이런 일자리마저 사라진다는 현실이 이들을 압박하는 셈이다. 이웃한 닛산공장 노동자의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워싱턴포스트는 16일자에서 ‘이것이 미국 제조업 일자리의 모습’이라며 닛산의 사내하청 노동자 크리스 영의 힘겨운 삶을 2페이지 기사로 실었다.
영은 닛산의 인기차종 인피니티 생산라인에서 일하지만 예이츠서비스 회사 소속이다. 닛산공장에서 일하는 7000여 노동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영과 같은 하청 노동자로 파악되고 있다. 영의 꿈은 닛산의 정규직이 돼 ‘닛산’이 새겨진 셔츠를 입고 일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연봉은 2배로 올라가고 주택담보대출이나 기업연금에 가입할 수 있으며, 병가를 낼 때 일자리를 잃을 각오를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타고 있는 주행거리 30만km 넘는 2001년산 GM 승용차 대신 닛산 자동차를 리스할 수도 있다. 이런 정규직이 되려면 훌륭한 이력관리가 필요한데 가령 친아들 재판에 가기 위해 결근한다면 희망은 날아가게 된다. 그 때문에 영은 지난달 밀어내기 생산 때 주말이면 새벽 3시에 집을 나서 10시간 교대로 일했다.
그는 “깨어 있기 위해, 또 잠을 자기 위해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가 받는 연봉은 집 임대료, 연료비, 자녀 교육비 등 보통 가정을 꾸미는데 모두 들어간다. 네 자녀를 둔 영은 입사 3년 만에 주간조에 편성돼 가족들과 저녁을 함께 할 시간이 있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과거만 해도 미국에서 제조업체 노동자는 풍요롭진 않지만 넉넉한 삶을 사는 중산층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는 크리스 영의 팍팍한 삶이 먹고 살 수는 있지만 과거 중산층이 누렸던 여유를 잃어버린 현재 제조업 노동자의 모습이라고 전했다.
폴크스바겐 노조설립이 부결된 한달 뒤인 이달 17일 워싱턴의 보수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에서 한 행사가 열렸다. 당시 노조 반대운동을 주도한 노동자자유센터(CWF) 등의 인사를 초청해 운동의 당위성과 성공담을 듣는 자리였다. 2010년 기준으로 미국에서 그나마 높은 편인 자동차 업계 노동자의 시간당 임금이 33달러인 반면, 노사위원회가 일반화한 독일 자동차 업계에선 그보다 두 배가 많은 67달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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